글로벌 '골드러시'의 역습…'좋은 금고'가 부족하다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5-10-15 07:30
수정 2025-10-15 07:50


최근 세계적으로 금을 보관하고 검증하는 금 보관 인프라에 '병목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골드러시’에 실물 금 수요도 급증하면서다.4000달러 시대의 개막1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국제 현물 금 가격은 트로이온스당 4078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올 한 해에만 53% 이상 급등한 수치다. 1979년 2차 오일 쇼크 이후 가장 폭발적인 랠리라는 분석이다.

최근 금값 랠리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분석이다. 단순히 인플레이션 헤지나 단기적인 안전자산 선호 현상을 넘어선다. 글로벌 통화 및 지정학적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중앙은행, 상장지수펀드(ETF) 투자자, 개인 투자자라는 세 개의 강력한 수요자가 동시에 실물 금을 사들이면서 그 파급력이 커졌다.

밥 트리에스트 노스이스턴대학 경제학 교수는 "금 가격 4000달러 돌파는 단순한 이정표가 아니다"라며 "이는 지정학적 불안, 통화 가치 하락에 대한 구조적 우려가 임계점을 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라고 지적했다.

중앙은행의 전략적 이동이번 랠리의 주요 요인은 미국 달러화에 대한 신뢰 변화라는 분석이 나온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동결한 사건이 시작이다. 달러화 자산이 더 이상 지정학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각국 중앙은행 중심으로 '탈달러화'가 가속했다.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인용해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중 미 달러화 비중은 최근 하락세를 보였다. 2001년 약 71%였던 달러 비중은 지난해 3분기에는 57.4%로 떨어졌다. IMF의 '각국의 외환보유액 통화별 구성보고서(COFER)' 최신 데이터(2024년 4분기 기준)에서도 달러 자산이 세계 공식 외환보유액에서 57.8%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10년 전보다 약 9% 포인트 감소했다.

금은 중앙은행의 공식 외환보유 통화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앙은행들은 금 보유를 확대했다. 미국의 싱크탱크 대서양협의회에 따르면 금은 전 세계 중앙은행의 공식 준비 자산의 약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세계금위원회(WGC) 자료에 따르면 세계 중앙은행은 2022년~2025년 4년 연속으로 연 1000톤 이상의 금 매입할 전망이다. 2010년대 연평균 매입량의 두 배 이상에 달하는 속도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흥국과 최근 지정학적 리스크 관련 국가가 금을 선호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적이다. 중국 인민은행은 2015년 외환보유액 대비 금 비중이 1.8%에 불과했다. 최근엔 4.9%까지 끌어올렸다. 러시아도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금융제재를 우려해 달러 자산 대신 금 보유를 크게 늘렸다. 터키, 인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태국 등도 매수 대열에 합류했다. 올 1분기에만 봐도 중국, 폴란드, 아제르바이잔 등이 적극적으로 금을 사들여 분기 합계 244톤의 순매수를 기록했다. 최근 5년 평균치보다 25% 큰 규모다.



후안 카를로스 아르티가스 세계금협회(WGC) 리서치 총괄은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은 단순한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넘어 서방 중심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자국 자산의 주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이라고 분석했다.

중앙은행들은 자국 영토로 금을 이전하는 '자국 송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2020년 약 50% 수준이었던 자국 내 금 보유 비중은 지난해 68%까지 급증했다. 이는 해외(뉴욕, 런던 등)에 보관된 자국 자산이 잠재적인 제재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 조치로 풀이된다.

중앙은행의 수요가 금 시장의 하방 지지선을 제공했다면, 가격 랠리의 기폭제는 기관과 개인 투자자의 자금이었다. 실물 금을 기반으로 하는 ETF로 자금 유입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 3분기 글로벌 금 ETF에는 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인 260억 달러의 자금이 순유입됐다.

금 ETF로 자금 유입은 단순히 금융 시장 내의 유동성 이동에 그치지 않는다. 투자자가 'SPDR Gold Shares(GLD)'나 'iShares Gold Trust(IAU)' 등의 실물 기반 금 ETF의 주식을 매수하면 금의 실물 전환 과정이 진행된다. 이 과정의 핵심 행위자는 이른바 '공인 참여자(Authorized Participant·AP)'로 불리는 대형 금융기관들이다.

AP는 ETF 운용사로부터 대량의 ETF 주식을 발행받는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실물 금괴를 ETF의 '수탁 은행'에 직접 입고해야 한다. 이 수탁 은행들은 HSBC, JP모간 등 세계적인 은행들이다. 보통 이들의 금고는 대부분 런던에 집중돼 있다. 런던이 전 세계 장외(OTC) 금 거래의 허브로 선택된 이유다. 런던금시장연합회(LBMA)가 정립한 'Good Delivery Bar' 표준은 금괴의 순도, 무게, 정련소 인증 등을 엄격하게 규정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품질 보증 역할을 한다.


인기 금고 부족?금 인프라 시장에 가해지는 압박 수준은 투자 금액을 실제 금의 무게로 환산해보면 이해가 쉽다. 금 가격이 트로이온스당 1250달러였던 과거에는 10억 달러로 약 25톤의 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올해 10월 기준으로 트로이온스당 4000달러에선 1미터톤(tonne)은 약 32,150.7 트로이온스다. 10억 달러면 약 7.78톤으로 과거보다 무게가 줄어든다. 같은 금액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실물 금의 양, 즉 '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그런데도 ETF와 중앙은행으로부터 유입되는 자금의 절대 규모가 커졌다. 여전히 실물 금 보관 및 물류 시스템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예를 들어 3분기 ETF 유입액 260억 달러는 약 202톤의 실물 금 확보 수요를 창출했다. 런던금시장협회(LBMA)에 따르면 올 8월 기준 런던의 공인 금고에 보관된 금의 총량은 8841톤이다.

금 인프라 관련 병목 현상은 시장 참여자들이 최상위 등급의 금과 보관 공간을 찾으면서 발생하고 있다. 중앙은행이나 대형 연기금 등 기관 투자자들은 아무 금고에나 자신의 자산을 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적 안정성, 예측할 수 있는 법률 시스템, 높은 수준의 보험 담보, 정기적인 독립 감사가 보장되는 최고 등급의 시설만 선호한다.

글로벌 금 시장에서 금괴의 가치는 어디에 보관돼 있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위치 프리미엄'이 있다. 중앙은행, 국부펀드, 대형 ETF와 같은 최상위 투자자들은 자산의 안전을 위해 최고 수준의 조건을 요구한다. 이들은 LBMA의 공인 금고이면서 정치적·법적 안정성이 수십 년간 검증된 국가의 시설을 선호한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금고는 런던, 뉴욕, 취리히 등 소수의 글로벌 금융 허브에 집중돼 있다.



최근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의 새로운 허브가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축적된 신뢰와 인프라의 벽을 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홍콩의 경우 정치적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다. 로버트 고틀리브전 HSBC 귀금속 트레이더는 "홍콩 시장이 진정한 국제시장인지, 아니면 중국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규정을 바꿀 수 있는 곳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엔 새로운 금 가치 평가 방식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월 LBMA은 '금괴 무결성 데이터베이스(GBI)'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GBI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LBMA가 인증한 정련소에서 생산되는 모든 골드바에 고유한 디지털 식별자를 부여한다. 해당 생산 정보, 소유권 이전 이력, 보관 위치 등을 영구적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목표는 '정련소에서 금고까지' 이어지는 금의 전체 생애주기를 추적해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분쟁 광물'이나 자금 세탁, 테러 자금 조달 등에 연루된 불법적인 금이 합법적인 유통망으로 편입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최근 금을 비롯한 실물 자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금 보안 물류 및 금고 산업도 주목받고 있다. 이 분야에서 떠오르는 기업은 브링크스와 루미스다. 두 회사 모두 귀금속 운송 및 보관 사업부를 운영한다. 금 시장의 실물 이동 수요 증가로 실적이 개선됐다. 브링크스는 1분기 실적 발표에서는 "귀금속 이동 증가로 인한 글로벌 서비스 성장했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은 '신중 모드'전 세계가 금을 중심으로 안전자산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지만 한국은행의 행보는 신중하다는 평가다.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지난 3년간 연평균 1000톤 이상의 금을 사들였다. 같은 기간 한국은행의 공식 금 보유량은 2013년 2월을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104.4톤에 머물러 있다.

올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의 약 1.2%에 불과하다. 금의 낮은 유동성, 높은 가격 변동성, 이자나 배당과 같은 현금흐름이 없는 무수익 자산이라는 점이 이유로 거론된다. 일각에선 한은이 과거 경험 때문에 금 매입을 주저하고 있다는 추정도 나온다. 한은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90톤의 금을 트로이온스당 1500~1600달러대의 가격에 집중적으로 매입했다가, 이후 금 가격이 급락하면서 '고점 매수'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글로벌 머니 X파일은 중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돈의 흐름을 짚어드립니다. 필요한 글로벌 경제 뉴스를 편하게 보시려면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 주세요]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