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늘 변화를 통해 살아남는다. 변화는 언제나 경계를 흔들 때 시작된다. 2025년 가을, 패션은 더 이상 런웨이와 거리를 나누지 않는다. 두 세계는 하나로 섞이고, 새로운 룩과 새로운 태도를 만들어낸다. 럭셔리 브랜드는 거리의 자유롭고 솔직한 무드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스트리트는 런웨이의 정제된 감각을 흡수해 새 시즌을 알려준다. 이번 시즌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룰을 벗어난 스타일의 시대'다.하이브리드 스타일의 힘2025년 FW(가을·겨울) 컬렉션을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하이브리드’다. 오버사이즈 레더 코트 위에 후디를 걸치거나, 미니멀한 슈트 팬츠에 워크웨어의 포켓과 벨트를 더하는 식이다.
디올은 전통적인 트렌치코트에 기능성 원단을 입혀 고전과 현대를 이어냈다. 발렌시아가는 해체적인 니트와 와이드 카고 팬츠를 런웨이에 올리며 '편안함 속의 권위'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프라다 역시 이번 시즌 하이브리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테크 원단 재킷에 슬림 팬츠를 매치하며 도시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룩을 보여줬다. 그 결과 런웨이 룩은 더 이상 특별한 무대 의상이 아니라, 실제 거리에서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다가왔다. 이는 단순히 믹스매치가 아니다.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럭셔리의 권위는 더 이상 드레스와 슈트에만 있지 않다. 이제는 거리에서 오는 편안함과 만나야 진정한 힘을 갖는다.Rebel Elegance, 반항의 세련됨
서울과 도쿄의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찢어진 니트, 리폼 데님, 두꺼운 부츠가 런웨이에서 그대로 등장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런웨이는 이 요소들을 정제하고 세련되게 가공해 또 다른 무드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루이비통은 잘린 듯한 니트를 클래식 슬랙스와 매치해 새로운 균형을 제시했다. 발렌시아가는 슬레진저 룩에 부츠를 더해 우아함과 투박함을 동시에 끌어냈다. 이런 조합은 단순히 파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세대가 원하는 ‘자유로움과 개성’을 옷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이다. 런웨이와 스트리트가 공통으로 공유하는 키워드가 바로 이 ‘Rebel Elegance’, 즉 반항적 우아함이다. 자유롭지만 멋스럽고, 파괴적이지만 세련된 이 감각이 이번 시즌을 대표한다.젠더리스 실루엣, 구분 없는 스타일
2025년 가을의 또 다른 키워드는 젠더리스 실루엣이다. 남녀의 경계가 사라지고, 누구나 같은 아이템을 공유하는 시대가 왔다. 오버사이즈 니트, 슬림 팬츠, 언더셔츠, 심플한 재킷은 남녀 모두의 옷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이템들이다.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슈트를 선보였고, 언더셔츠와 슬림 팬츠를 남녀 모델 모두에게 입혔다. 미니멀한 블랙 팬츠와 크롭 재킷을 남녀가 함께 착용하며 무대를 채웠다. 이런 흐름은 런웨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과 도쿄 유럽 거리에서는 연인이나 친구가 같은 아이템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입는 장면이 흔하다. 한쪽은 오버사이즈로 루즈하게, 다른 한쪽은 벨트로 허리를 조여 입는다.
젠더리스는 단순히 성별 구분을 없앤다는 개념을 넘어, 옷을 통해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되었다. 이는 특히 Z세대와 알파세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옷은 성별보다 개성의 도구이며, 스타일은 규칙보다 즐거움이 된다.
색과 소재의 흐름
이번 시즌 색채의 흐름은 크게 두 갈래다. 첫째는 자연에서 온 색감이다. 카키, 카멜, 브라운 같은 어스 톤은 편안하고 안정적이며, 일상에서 쉽게 입을 수 있다. 둘째는 미래적이고 차가운 색감이다. 크롬 실버, 메탈릭 블루, 아이스 블루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무드를 만든다. 여기에 라임, 체리 레드, 퍼플 같은 네온 포인트 컬러가 더해져 활기를 불어넣는다.
소재 역시 다층적이다. 고어텍스, 나일론 같은 기능성 원단은 실용적이고, 워시드 데님은 캐주얼하면서도 빈티지한 무드를 살린다. 가죽과 인조 퍼는 럭셔리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니트와 메시는 서로 대비되면서 색다른 질감을 낸다. 브랜드들은 이 다양한 소재를 섞어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한다. 이번 시즌은 단순히 하나의 소재나 색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가 섞이고 충돌하는 가운데 새로운 조화가 탄생한다.
세대가 만든 새로운 룰
패션의 중심은 이미 Z세대와 알파세대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옷을 고를 때 실험적이면서도 편리한 스타일을 원한다. 한 벌의 옷이 일상에서도, 파티에서도, 그리고 SNS에서도 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대는 룰을 따르기보다 스스로 룰을 만든다. 크롭 톱에 테일러드 팬츠를 매치하거나, 정장 재킷에 스니커즈를 신는 식이다. 성별 구분은 더욱 흐려졌다. 같은 니트, 같은 팬츠를 남녀가 함께 입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럭셔리 소비자층 역시 이 흐름에 합류했다. 더 이상 브랜드 로고만으로 권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소비자들은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브랜드를 선택한다. 결국 스트리트와 럭셔리는 이제 같은 언어를 쓰게 됐다.모두가 만드는 무드
길거리와 런웨이가 만난(Street Meets Runway) 2025년 가을의 패션은 단순한 협업이나 장르 혼합이 아니다. 그것은 패션 권력이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과거에는 런웨이가 먼저 움직이고 거리가 뒤따랐다. 이제는 거리가 앞서고, 런웨이가 그것을 정리해 새로운 언어로 전달한다.
지금의 패션은 소수가 정하는 유행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드는 무드다. 런웨이와 거리, 남성과 여성, 럭셔리와 스트리트. 모든 경계가 흐려진 자리에서 남는 건 자유와 개성뿐이다. 룰을 벗어난 스타일, 뒤섞인 룩,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즐거움. 이것이 바로 2025 가을 패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짜 얼굴이다.
최혜련 아티스트 디렉터 & 스타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