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한반도에서 태어나 김치를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이죠. 반면 하리보 젤리는 제가 베를린에서 처음 접한 음식이었어요. 유럽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중간 지점에 있는 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연극 '하리보 젤리'의 구자하(41) 작가 겸 연출은 13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기자들과 만나 작품의 창작 배경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하리보 젤리'는 오는 16일 개막하는 제25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대표작으로 3회차 공연이 일찌감치 매진됐다. 전통적 연극의 틀을 뛰어넘어 직접 만든 영상과 음악, 로봇 등 다양한 비연극적 요소를 결합하는 게 구 작가의 스타일. 그의 주요 활동 무대인 유럽에선 이를 '하이브리드 연극(hybrid theatre)'이라고 부른다.
'하리보 젤리'는 지난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초연했다. 오는 16일과 18~19일엔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한국 관객을 처음 만난다. 무대는 한국의 식문화와 정서를 녹인 포장마차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한국에서 태어나 10년 넘게 유럽에 살고 있는 구 작가는 무대에 직접 올라 한국 음식에 얽힌 개인적 경험을 관객과 공유한다. 관객 두 명은 포장마차로 초대돼 공연의 일부가 된다. 김치전, 미역냉국, 젤리 등 구 작가가 직접 만든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구 작가는 이번 작품을 "김치 디아스포라(diaspora,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집단 또는 이주 그 자체)"라고 요약했다. "제가 김치를 가지고 유럽에 도착했을 때 겪었던 에피소드를 담았어요. 김치는 발효식품이라 오래 포장해 두면 가스가 차잖아요. 유럽에서 아시아 음식을 먹은 뒤 냄새 때문에 겪었던 인종차별 이야기도 있고요. 하지만 외국에 나가 살지 않는 국내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이주한 뒤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으니까요."
무대에는 구 작가 외에 달팽이와 장어, 하리보 젤리 등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달팽이와 장어, 하리보 젤리에는 '젤리니스(jelliness)'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젤리니스'는 제가 만든 단어인데, 겉보기엔 연약할 것 같지만 외부 충격에도 다시 회복하는 젤리의 힘을 나타냅니다. 유럽에서 비유럽인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 답이 바로 '젤리니스'라고 생각해요."
구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부터 전형적인 연극 무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만든 영상과 음악으로 연극의 경계를 넓히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이유다. 그는 "한국에서는 연극과 무용조차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큰 것 같다"며 "연극이라는 매체가 상당히 정체돼 있고 고정 관객 외의 관객을 초대하는 힘이 많이 약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공연예술에 관심이 적은 새로운 관객을 더 많이 유입시키고 나만의 관객을 개발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연극을 만들고 있다"며 "과감하게 말하면 세계 공연예술 장르에 충격을 주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구 작가가 정의하는 연극은 무엇일까. 그는 "연극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연극의 태생적 원리는 관객을 극장으로 초대하고 연대를 이뤄 정치적 힘을 발현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닌 예술가이기 때문에 정치적 힘을 예술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는 2027년 초연을 목표로 한 신작도 준비 중이다. 제목은 '본 투 비 케이 투 비 팝(Born to be K to be Pop)'.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 무대에 오르지 않고 전문 배우를 섭외할 예정이다. "과거와 현재가 아닌 '포스트 K팝'에 대한 고민을 담으려 합니다. 그동안은 제가 무대에 직접 서다 보니 정작 제 무대를 볼 수 없었어요. 무대에 서지 않는 이번 작업이 또 하나의 도전이 될 것 같아요."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