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가상자산 대폭락 부른 ‘무기한 선물’

입력 2025-11-03 06:01
수정 2025-11-10 08:14
[가상자산 따라잡기]



지난 10월 11일 새벽, 가상자산 시장이 대혼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반도체와 소프트웨어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글로벌 증시가 급락했고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극대화됐다. 그러나 이번 하락은 단순한 정책 뉴스 하나로 설명되기엔 그 규모와 속도가 달랐다. 비트코인은 낙폭이 제한적이었지만, 거래량이 적은 알트코인 다수는 1시간 만에 70~90% 폭락하며 패닉에 빠졌다. 시장은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가격 조정’을 넘어 ‘구조적 붕괴’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이번 사태의 핵심에는 ‘무기한 선물(perpetual futures)’이라 불리는 가상자산 파생상품이 있다. 무기한 선물은 말 그대로 만기일이 없는 선물 계약으로, 투자자가 일정 증거금을 맡기면 포지션을 무기한 유지할 수 있는 구조다. 이 상품은 2016년 아서 헤이즈가 설립한 비트멕스(BitMEX)를 통해 처음 시장에 도입됐다. 당시에는 금융 규제를 우회하면서도 효율적인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혁신적 상품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 혁신이 가져온 것은 높은 접근성과 함께 극단적인 레버리지와 청산 리스크였다.





부풀려진 레버리지…트럼프 발언이 방아쇠

무기한 선물은 이후 바이낸스, OKX 같은 대형 거래소로 빠르게 확산됐고, 지금은 전 세계 가상자산 거래의 중심에 있다. 시장 참여자들은 현물보다 파생상품을 더 활발히 거래하며, 가격 변동성의 상당 부분이 이 시장에서 만들어진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이런 구조가 블록체인 위로 옮겨 가며 ‘퍼프 덱스(Perpetual Decentralized Exchange·Perp DEX)’라 불리는 온체인 기반 무기한 선물 거래소들이 등장했다.

퍼프 덱스는 중앙 거래소처럼 고객 자산을 예치받지 않는다. 사용자는 자신의 지갑을 연결해 직접 거래하고, 모든 거래내역은 블록체인에 기록된다. 거래의 투명성, 자산의 자율성, 접근성 면에서 큰 진보였고,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 같은 프로젝트는 그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탈중앙화가 위험을 분산시키는 장치가 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청산 통계를 집계하는 코인글라스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24시간 동안 전 세계 가상자산 시장에서 약 190억 달러(약 26조 원) 규모의 포지션이 강제 청산됐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인 2020년 3월의 약 12억 달러, 2022년 FTX 붕괴 당시의 약 16억 달러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다. 그중에서도 하이퍼리퀴드를 포함한 여러 퍼프 덱스에서 대규모 손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으며, 하이퍼리퀴드에서는 불과 수 시간 사이에 1000개 이상의 계정이 전액 청산되고, 약 6000개 이상의 지갑이 손실을 입으며 12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정 거래소가 원인이었다기보다, 시장 전체가 얇은 유동성 위에 과도한 레버리지를 얹은 상태에서 충격을 맞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발언은 올해 3월에도 있었다. 당시에도 시장이 흔들렸지만, 지금처럼 순식간에 붕괴하진 않았다. 차이는 과열된 시장에서 무분별한 레버리지 투자가 만연했다는 것이었다. 10월 초 시장은 상장지수펀드(ETF) 승인 및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뚜렷한 상승 동력이 사라진 채, 정체된 구간에서 과열된 레버리지가 누적돼 있었다. 미결제약정(Open Interest·OI)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현물 유입 없이 파생 포지션만 쌓이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형성됐다. 다시 말해 시장은 이미 불안정하게 부풀려진 상태였고, 외부 충격은 단지 그 균형을 무너뜨린 방아쇠였을 뿐이다.



아시아 투자자들 잠 든 새벽

여기에 시간대도 악재였다. 사건은 한국 시간 새벽, 즉 미국과 유럽의 주요 마켓메이커가 휴식 중인 시간에 발생했다. 유동성이 가장 얇은 시간대에 대규모 청산이 시작되자, 가격 하락은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도미노처럼 번졌다. 특히 알트코인 시장은 유동성 자체가 희박해 단 한 번의 청산으로도 가격이 30~40%씩 급락하는 현상이 연쇄적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지역 투자자들이 대부분 자고 있는 새벽에 이런 폭락이 발생했다는 점은, 왜 피해가 압도적으로 컸는지를 설명해준다.

이 사건은 금융 혁신의 양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기한 선물은 중앙화 금융이 제공하지 못하던 개방성과 속도를 선사했지만, 그만큼 제어 장치가 부재한 시장이다. 온체인 거래소라 해도 청산은 블록 단위로 자동 집행되며, 청산이 발생할 때마다 추가 하락을 유발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혁신의 속도가 리스크 관리의 속도를 앞지른 것이다. 거래의 투명성은 높아졌지만, 투자자의 생존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졌다.

국내에서도 레버리지 위험을 시험하는 시도가 있었다. 예컨대 코인원은 2017년 말 마진거래(증거금 기반 레버리지 거래)를 제공했다가 12월 18일부터 신규 주문 중단 및 강제 청산을 거쳐 서비스를 종료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업비트와 빗썸은 각각 ‘코인 빌리기’, ‘코인 대여’ 서비스를 운영했으나, 금융당국의 경고와 정책 리스크 우려 속에 서비스 규모를 축소하거나 사실상 종료된 상태다.

많은 이들이 한국의 규제를 느리고 답답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 그 ‘느림’이 오히려 투자자 보호의 장치였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이나 홍콩, 싱가포르처럼 시장 개방에 적극적인 국가들이 오히려 이번 폭락의 직격탄을 맞았다. 금융 규제의 본질은 자유를 억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파국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행착오 속 새로운 해법 찾아야

무기한 선물 시장은 이론적으로는 ‘자율적으로 균형을 찾는 구조’지만, 실제로는 시장참여자들이 유사한 알고리즘과 자동청산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탓에 일방향적 쏠림이 발생한다. 이번에 피해를 본 투자자들 역시 나름 ‘합리적인’ 수준의 리스크를 상정했겠지만, 가상자산 시장은 루나 사태 등에서와 같이 통계적 합리성이 일관되게 지켜지는 곳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대형 세력의 공매도 전략이 이번 사태를 촉발했다는 음모론도 제기되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시장이 구조적으로 취약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과거 외환위기 때 헤지펀드가 파운드화를 공격하며 영국을 위협에 빠뜨렸듯이 가상자산 시장 역시 대규모 자금력을 가진 세력이 시장의 취약한 구조를 이용해 본질적으로 ‘공격 가능한 시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뼈아픈 상처이자 완전한 회복이 어려운 깊은 흉터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혁신의 본질은 실패와 학습을 통해 완성된다. 루나 사태, FTX 붕괴, 그리고 이번 대규모 청산 이벤트까지 가상자산 시장은 늘 무너짐 속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아왔다. 혁신은 자유로부터 나오지만, 자유만으로는 시장을 지탱할 수 없다.

금융 혁신의 명암은 결국 속도의 문제다. 자유를 앞세운 혁신이 리스크 관리와 제도적 장치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아내느냐가 앞으로의 시장을 결정할 것이다. 이번 사태를 두고 ‘근본 없는 자산 시장’이라는 조롱을 던지기보다는, 시행착오 속에서도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는 이들의 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상자산 업계에 필요한 것 역시 좌절이 아니라 학습이며, 단기적 손실을 미래의 규율로 전환하는 힘이다.

박태우 스페이스바 벤처스 대표 tw@spacebar.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