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사탄탱고' '라스트 울프'…묵시록 거장의 대표작들

입력 2025-10-10 17:21
수정 2025-10-10 23:44

한강 이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사진)의 시간이다. 지난 9일 스웨덴 한림원이 그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했다. 일부 언론조차 성과 이름을 혼동할 만큼 그의 이름과 헝가리 문학은 국내 독자에게 다소 새롭다. 알마 출판사를 통해서만 지금까지 그의 대표작 여섯 권이 국내 출간됐다. 최근작 국내 출간을 위한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낯선 거장을 향한 독자의 호기심에 불이 붙었다. 수상자 발표 직후 일부 작품은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으로 직행했다.

“묵시록적(apocalyptic) 공포의 한가운데서 예술의 힘을 다시금 확신하게 하는, 강렬하고도 예언적인 작품세계.” 한림원이 밝힌 수상 이유다. 그의 작품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작 여섯 권을 소개한다. 7시간짜리 영화 ‘사탄탱고’의 원작

1985년 출간된 <사탄탱고>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공산주의가 붕괴돼가던 1980년대 헝가리, 집단농장이 해체된 마을을 배경으로 체제의 몰락과 인간의 불안을 그렸다. 스웨덴 작가이자 노벨위원회 위원인 스티브 셈산드베리는 수상자 발표 직후 외신 인터뷰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를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할 책’으로 이 작품을 가장 먼저 꼽으며 “경이로운(magnificent) 데뷔 소설”이라고 했다. 예스24에 따르면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이후 12시간 동안 <사탄탱고> 판매량은 올해 연간 판매량의 약 12배로 늘어났다.

1994년 헝가리 거장 터르 벨러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했다. 상영 시간이 438분에 달하고 잔인할 만큼 긴 롱테이크신이 이어지는데 이동진 영화평론가 등은 ‘인생 영화’로 극찬했다. 인간 본성에 지독한 탐구심을 보여줘서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 소설 첫머리에 인용한 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 속 구절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카프카를 동경해 외신 인터뷰에서 “카프카를 읽지 않을 때는 카프카를 생각한다. 카프카를 생각하지 않을 때는 그를 그리워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한림원이 크러스너호르커이에 대해 “카프카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까지 중앙유럽의 서사적 전통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작가”라고 평한 건 그에게 최고의 극찬인 셈이다. “세상의 쓴맛이 내게 영감을 준다”<사탄탱고>와 더불어 <저항의 멜랑콜리>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묵시록’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 소설은 헝가리의 한 작은 마을에 서커스 유랑단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보여주겠다고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고래를 운반하는 불길한 트럭은 그저 광장 가운데 세워져 있을 뿐이지만 마을에는 온갖 소문과 광기가 휘몰아친다. 극단주의와 탈진실의 시대에 한림원이 그를 주목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셈산드베리는 “그의 소설들은 묵시록적이라고 묘사되는데, 어쩌면 그 점이 그를 (소설을 발표한) 1985년보다 지금 시대와 더 깊이 맞닿게 한다”고 설명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수상 직후 노벨위원회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쓴맛, 즉 비통함”이라고 말했다. “지금 세상의 상태를 생각하면 너무 슬픕니다. 그것이 제 깊은 영감의 원천입니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역시 작은 도시가 광기에 휩싸이는 얘기다. 은둔하던 노귀족 벵크하임 남작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768쪽에 달하는 압도적 분량이 ‘만연체의 거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라스트 울프>는 아예 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소설이다. 작품이 하나의 기나긴 문장으로 읽히기를 바라며 문장을 쉼표로 이었다. 맨 마지막 문장에만 마침표가 찍혀 있다. ‘만연체 장인’인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넋두리처럼 세상을 비관하기만 한다면 노벨문학상이 그에게 돌아갔을 리 없다. <세계는 계속된다>는 종말로 향해 가는 세계에서 인간이 파국에 저항하는 하찮은 노력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이야기다. “아니,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끝나버렸는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속일 수는 없게 됐다. 그저 어떻게든 유지해나가면서 계속할 뿐이다. 무언가는 계속되고, 무언가는 살아남는다.” “모두가 상상력 되찾기를”음악은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주요한 소재다. 그는 젊은 시절 재즈밴드에서 피아노를 치고 록그룹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음악에 깊이 매료된 것으로 전해진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작품에 녹아들었다. <사탄탱고>는 제목에 들어간 ‘탱고’처럼 소설이 앞뒤로 스텝을 밟는다. 1부가 1장에서 6장으로 순차 진행된 후 2부는 6장에서 1장으로 역순으로 이어진다.

단편소설 17편이 담긴 <서왕모의 강림>에는 각각의 작품에 한 가지 이상의 예술 작품이 등장하는데, 그중 ‘사적인 열정’에서는 바로크시대 음악을 향한 열정적 옹호가 쏟아진다. 바로크시대, 그중에서도 바흐 음악은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 속에서 여러 차례 연주된다. 그의 작품에 시작과 끝이 순환하는 구조가 많은 것도 바흐의 푸가를 연상하게 한다. 반복과 변주를 오가는 바흐의 대위법은 세계의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표현한다. 동양의 예술도 녹아든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뿐 아니라 중국, 몽골, 일본 등에 체류하며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수록작 중 ‘그는 새벽에 일어난다’ ‘이노우에 가즈유키 명인의 삶과 일’ ‘제아미는 떠난다’ 등은 일본 전통 연극 ‘노’의 가면과 배우를 다룬다.

크러스너호르커이가 2021년 현지 출간한 장편소설 <헤르슈트 07769>는 아직 국내 출간 전이다. 이 책도 알마 출판사를 통해 내년 초 나올 예정이다. 현대 독일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우울과 불안에 휩싸여 사는 ‘플로리안’이 주인공이다. 그가 인류 멸망에 대한 과학적 징후를 경고하기 위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여기에도 바흐 음악이 주요 소재로 나온다.

그의 작품들은 절망과 타락 그리고 그 끝의 희망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그는 수상 직후 스웨덴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모두가 상상력(ability to use their fantasy)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상상력이 없으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책을 읽고 즐기며 풍요로워지세요. 독서는 우리가 이 어려운 시대를 견디는 힘을 줍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