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원작이나 근간이 되는 책을 떠오르기는 쉽다.<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은 반대다. 글과 책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 뇌리에 도리스 위시먼을 어느 영화에선가 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당신은 안 그럴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낸 골딘을 생각했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란 영화가 떠올랐다.
낸 골딘은 1953년생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한창 때인 1970-80년대에 이 도리스 위시먼(1912~2002)의 60년대 전성기 작품들을 즐겨 봤을 가능성이 높다. 낸 골딘이나 로버트 메이플쏘프(1946~1989)같은 아방가르드하며 섹스플로이테이션을 소재로 삼았던 사진작가들이라면 모두 이 도리스 위시먼 영화의 영향권 아래 있었을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준 것이 바로 이 책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이다. 책을 보면서 실로, 격정적으로 들끓었던 진정한 혁명의 시대, 1960년대의 미국이 느껴진다. 실로 그렇게 위대했던 전위의 시대는 가고 남루하고 비루한 대중문화의 세월만 남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영화평론가이자 영화학자인 김효정의 번역서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이란 신간을 딱 받아 들었을 때, 앞단의 열 몇 페이지가 누드와 섹스로 가득한 포스터로 깔려 있었음에도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약간의 조바심도 났다. 후딱 읽어 버려야, 부담을 덜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주저했던 분명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나는 그간 (30년간이나. 우웩!) 도리스 위시먼이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위시먼의 영화를 본 적도 없다. 김효정 박사가 언젠가 도리스 위시먼 책을 보여주며 “이 감독 작품은 정말 아저씨가 좋아할 거야 (그녀는 나를 대체로 아저씨라 부르는데 아마도 그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한참 인기를 끌 때쯤이어서였을 것이다)”라고 했을 때도 나는 꽤 심드렁하게 반응했었다. 본격적으로 번역하겠다 했을 땐 오히려 말렸을 정도다. “도리스 위시먼이 섹스플로이테이션 전문 감독이었다고? 너는 박사 논문을 한국 호스티스 영화 연구로 했잖아. 그러면 자꾸 너의 이미지가 섹스, 여성주의 등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어. 시야를 다른 곳으로 넓혀라. 그게 낫지 않겠어?”
그런데 막상 책 꼴이 되어서 눈앞에 나타났고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몇 장 넘어가기도 전에 이건 위대한 발견이자 발굴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하위문화가 얼마나 튼튼한 생명력을 지녔으며 이른바 고급예술의 저변에서 수십 년간 어떠한 자양분이 돼왔는지 느끼게 만든다. 어쩜 이런 사람과 이런 영화 (예컨대 트랜스젠더가 성전환수술을 받고 자신의 질을 시험해 보고 싶어 택시 기사를 유혹해 모텔에서 섹스를 나누는 씬이 들어 있는 영화, <렛 미 다이 어 우먼> 같은)가 있었는지를 몰랐을까 싶다. 이런 영화가 있었던 시대를 왜 지금의 우리는 잊고 살아가고 있을까, 라는 생각도 가지게 한다. 도리스 위시먼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를 만들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사라지고 이제 하드코어 포르노가 넘쳐나는 직접적이면서 공격적인 시대로 변화했다. 영화 속 섹스 장면에서는 이제 더 이상 고단백의 메타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위시먼의 책을 보고 그녀의 영화에 대해 더듬어 가다 보면, 섹스가 ‘생각’과 사유로 간주 되던 시대가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김효정의 이번 번역서는 도리스 위시먼과 함께 와카마츠 코지의 영화 세계까지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삼삼하다. 코지는 일본 ATG 시대를 대표했던 ‘망측한’ 감독으로 아방가르드한 폭력 세계, 특히 그의 걷잡을 수 없는 섹스 영화들, 로망 포르노의 사고 체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위시먼과 코지는 닮은 데가 있다. 이번 번역서는 그런 의미에서 국내 영화문화를 새로운 접경지역으로 다가서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을 보고 있으면 내가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그녀의 영화를 ‘적어도 읽어 내고 있다’라는,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예컨대 <달에서의 누드>는 우주비행사가 다른 행성에서 에덴동산과 같은 곳을 발견하게 되는 얘기인데 당연히 나체촌이겠다. 불현듯 이 <달에서의 누드>는 매우 재밌고 코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엄청난 양의 가슴 클로즈업이 나온다는 <치명적 무기>도 보고 싶은 영화가 됐다. 한국 사회가 도로시 위시먼의 영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가. 무려 50~60년 전의 일인데도 우리에게는 낯설고 여전히 충격적일까. 그 같은 시차에 대해 우리가 성찰할 무엇은 없는 것일까.
평론가 김효정의 번역 노고를 치하한다. 얄팍한 장당 번역료를 받으며 밤새 고생했을 것이다.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이런 책은 다시는 내지 않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화 책, 영화 학술서, 공격적인 페미니즘이 연상되는 여성 감독을 다룬 책은 잘 안 팔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안 팔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올해 나온, 가장 발칙하면서도 흥미로우며 학술적으로나 영화평론의 측면에서나 귀중한 업적이 될 것이다.
뛰어난 영화평론은 영화를 찾아서 보게 만든다. 결국엔 해당 영화, 혹은 아예 영화 자체를 사랑하게 만든다. 뛰어난 영화 이론서 역시 결국엔 그 영화를 찾고,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도리스 위시먼의 작품들이 ‘사랑스러운’ 영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효정의 이번 번역서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도시스 위시먼의 영화들을 찾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활동했던 1960년대의 시대로 우리를 인도하게 할 것이다. 좋은 책은 시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중첩시킨다.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이 해낸 귀중한 역할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