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 대미투자 협상에 KIC 역할론 솔솔

입력 2025-10-02 11:10
이 기사는 10월 02일 11:1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관세 협상 조건으로 내세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의 실행 방안을 둘러싸고 KIC(한국투자공사)의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풍부한 해외투자 경험과 자금을 보유한 KIC가 미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지나친 정책적 개입으로 인해 기금 운용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KIC의 총운용자산(AUM)은 지난해 말 기준 2065억 달러(약 290조원)에 달한다. 주식·채권 등 전통 자산이 약 70%를 차지하며, 이 중 63.97%가 북미 시장에 투자돼 있다. 사모펀드·부동산·인프라 등 대체투자 영역에서도 북미 비중이 높다. 이미 미국 시장 투자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KIC가 정부의 대미 투자 카드에서 거론되는 이유다.

KIC는 원칙적으로 ‘글로벌 수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며, 대부분의 투자를 간접 방식으로 집행해왔다. 정책적 목적에 따른 직접투자는 거의 없었다. 2013년 정부가 국내 기업의 해외 인수합병(M&A)을 지원하기 위해 50억 달러를 위탁한 사례가 있지만,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다만 최근 변화의 조짐도 감지된다. 지난해 9월 취임한 박일영 사장은 국내 기업을 전략적 투자자(SI)로 끌어들여 해외 유망 기업 인수에 나서는 방안을 강조해왔다.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AI) 등 미래 산업군을 주요 투자 타깃으로 지목했고, 올해는 설립 20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사모펀드 위탁운용사를 선정에 나섰다. KIC의 투자가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FI)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KIC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도 비슷할 것으로 예상된다. KIC가 국내 대기업과 공동투자 컨소시엄을 구성해 미국 현지 기업 M&A에 뛰어드는 시나리오, 정부 출자금을 받아 별도 펀드를 조성한 뒤 미국 인프라 사업에 투자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예컨대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첨단 제조 인프라 펀드에 KIC가 앵커 투자자로 참여하는 형태다. 이는 싱가포르 테마섹이나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처럼 전략 산업에 공적 자금을 투입한 해외 사례와도 유사하다.

정치권의 시선도 KIC로 향하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KIC를 향한 대미 투자 관련 질의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과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도 ‘국부펀드 역할론’을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KIC 고위 관계자는 "정부로부터 구체적 투자 방향이나 지시를 받은 적이 없고, 자체 검토도 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일각에선 장기 투자를 통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익률 달성을 추구하는 KIC에 외부 입김이 지나치게 작용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자금을 굴리는 KIC의 특성상 손실이 발생하면 국민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KIC의 참여는 명확한 수익성 전망과 위험 관리 체계가 전제돼야 한다”며 “미국과의 협상 결과와 별개로 독립적 투자 원칙이 흔들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