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01일 10:2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국내 금융회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 환경에 직면해 있다. 빅테크 기업과 핀테크 서비스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금융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고, 고객은 더 편리하면서도 더 안전한 서비스를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금융회사들은 디지털 전환을 생존 전략으로 삼고, 비즈니스 경쟁력 강화를 위해 디지털 신기술을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초개인화 금융 서비스, 클라우드 기반 인프라 전환, 빅데이터를 활용한 영업력 강화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시도는 고객 경험을 개선하고, 업무 효율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수익 기회를 창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글로벌 주요 은행들도 이미 AI와 데이터 기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국내 금융권도 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혁신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보안 리스크는 더욱 복잡하고 파괴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금융보안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금융권에서 탐지된 사이버 공격 건수는 2020년 대비 2024년에 약 2.3배 증가했다. 단순한 침입 시도를 넘어, 랜섬웨어, 공급망 공격, 내부자 정보유출, 클라우드 설정 오류 등 공격 유형은 다양해졌고, 피해 규모도 커지고 있다.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그 위협은 현실적이다. 국내 한 금융기관은 외주 협력사 시스템의 취약점을 통해 고객정보 수십만 건이 유출되었다. 일부 인터넷전문은행에서는 클라우드 설정 오류로 계정 정보가 외부에 노출되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글로벌 은행이 대규모 DDoS 공격으로 모바일 뱅킹 서비스가 중단되며 주가가 단기간에 급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보안이 더 이상 IT 부서의 기술적 관리 항목이 아니라, 기업의 신뢰와 시장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경영 과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의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보안 시스템 미비가 발견되어도 과태료 수준의 제재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경영진 문책, 기관 경영 제재, 업무 정지로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과징금이 부과되며, 제재의 금액과 강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됐다.
망분리 규제 역시 과거의 일률적 강제에서 합리적 완화로 전환되는 대신,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보안 역량을 입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체계로 바뀌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에 따라 고객 정보의 라이프사이클 관리, 제3자 제공 투명성, 분리보관 의무도 더욱 엄격해졌다. 이제는 사이버 사고가 발생 시 정보보호최고책임자(CISO)뿐 아니라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보안이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경영진의 리스크 관리의 본질로 격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금융기관은 단순히 규제를 충족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안체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제로트러스트(Zero Trust) 기반 접근이다. 더 이상 네트워크 경계만으로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사용자, 단말기, 애플리케이션 등 모든 접근 요소를 끊임없이 검증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제로트러스트는 보안 강화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업무의 편의성과 생산성까지 함께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직원이 여러 단말과 네트워크를 오가며 불필요한 불편을 겪는 대신, 단일 인증 환경에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보안은 결국 ‘업무가 더 잘 되도록 돕는 장치’가 될 때 조직에 자연스럽게 안착할 수 있다.
AI 기반의 자율보안체계 도입도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공격자는 이미 AI를 활용해 고도화된 침투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자 역시 AI를 기반으로 위협을 실시간 탐지·분석하고, 대응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여야 한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기관에서는 AI 기반 분석을 도입한 결과 기존보다 40% 이상 빠른 탐지·차단 효과를 얻었다는 보고도 있다. 국내 금융권 또한 AI를 단순 기술이 아닌, 보안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금융당국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방향은 자율보안규제로의 전환이다. 일률적인 규정 준수에서 벗어나, 각 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보안 규칙을 만들고 이를 충실히 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자체적인 규칙을 수립하고, 운영성과를 입증하며, 사고 발생 시 책임을 지는 구조다. 이를 위해서는 내부 보안 거버넌스를 정교하게 설계하고, 체계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한다. 자율보안체계는 규제 부담을 줄여주는 동시에, 해당 기관이 보안 역량을 통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다.
보안은 더 이상 비용이 아니라 기업 가치와 신뢰를 지탱하는 일종의 ‘투자’다. 따라서 이사회와 경영진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보안이 비즈니스 전략과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CISO의 권한 강화와 정보보호 조직 확대다. 전문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보안 조직이 전사적 컨트롤 타워로 기능하기 어렵다. 경영진은 CISO가 확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실질적인 권한과 자원을 부여하고, 보안 조직이 현장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보안을 실현하는 사람의 태도와 역량이 중요하다. “보안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식의 답변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보안을 강화하면서도 비즈니스 가능성을 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사용자 친화적이고 비즈니스 친화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보안이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이 된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기술과 제도를 이해할 뿐 아니라, 현장의 실무와 전략까지 꿰뚫는 보안 전문가를 꾸준히 양성해야 한다. 결국 금융기관 보안의 미래는 제도나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