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설득 없이 갈등만 키워”…성분명 처방 논란 확산

입력 2025-09-30 18:22
수정 2025-10-02 14:43

국회가 품절의약품 해법으로 성분명 처방 입법을 추진하자 의약계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약사단체는 국민의 조제약 선택권 확대를 내세우지만, 의사단체는 원내조제·선택분업을 넘어 의약분업 자체의 폐지까지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직역 간 힘겨루기가 커지면서 정작 환자 중심의 논의는 실종됐다는 회의감이 국민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국민 선택권 확대” vs “의학적 위험 간과” 30일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는 오후 2시부터 대한약사회 주최로 ‘성분명 처방 한국형 모델 도입’을 주제로 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약 이름 대신 의약품의 성분과 함량만을 처방해 약국에서 동일 성분 약을 선택·조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현장에는 토론회를 주최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남인순·서영석·김윤·장종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권영희 대한약사회 회장을 비롯한 약사회 인사 등이 자리했다.

첫머리발언에 나선 권 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2007년 국립의료원 시범사업에서 긍정적 효과가 확인됐지만, 제도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도입의 시급성을 호소했다. 실제 2007~2008년 국립의료원에서 실시한 ‘성분명 처방 시범사업’에서는 의약품 20개 성분, 32개 품목이 성분명으로 처방됐다. 당시 보건복지부 의약품정책과는 “성분명 처방의 경우 같은 성분의 의약품 중 최고가로 조제되는 비율이 낮았다”며 “환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30명 중 20명인 66.6%가 성분명 처방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장 의원이 발언대에 서자 약사 단체에선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장 의원은 지난 2일 수급 불안정 의약품 처방 시 성분명을 의무 기재하고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처벌 조항이 담긴 의료법·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장 의원은 “최근 수급 불안정 의약품에 대한 법안 발의 이후 많은 공격 받고 있다”며 “환자 입장에서 보면 수급 불안정 상태에서 어떻게 국민 건강 지속해서 지켜나갈 것인가 했을 때 성분명 처방 타당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토론회 발제를 맡은 김대진 의약품정책연구소 소장은 “해외 주요국은 상품명이 아닌 성분명 처방이 일반화돼 있다”며 “환자 안전 향상, 복제약(제네릭) 사용 확대를 통한 비용 절감, 불법 리베이트 차단과 제약산업 투명성 강화가 그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는 동일 성분 제네릭이 과잉 생산돼 품절과 폐기 비용이 발생하고 고가 제네릭 사용 비중도 높아 환자 부담이 크다”며 제도 연착륙을 위해 품절약·다빈도 성분부터 시작해 고혈압·당뇨 등 주요 만성질환으로 확대하는 단계적 도입 방안을 제시했다.


같은 시각 국회 앞에서는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맞불 1인 시위를 벌였다. 김 회장은 “특정 직능단체가 직역 이권만을 챙기기 위해 의학적 위험성을 못 본 체하고 추진하는 성분명 처방 강제 시도는, 의료의 근간을 뒤흔드는 무책임한 도발”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성분명 처방 강행은 ‘의약분업 파기’ 선언”이라며 “이미 한계를 드러낸 의약분업의 틀 속에서 위험한 정책을 강행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약국 조제 또는 병·의원 내 조제를 선택할 수 있는 ‘환자선택분업’으로의 전환을 즉각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계의 반발은 지역의사회로도 확산하고 있다. 전날 전북특별자치도의사회는 성명을 내고 “성분명 처방 강제는 국민 건강을 볼모로 삼은 졸속 실험이자 의약분업 기본 원칙을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충청남도의사회도 같은 날 발표한 성명에서 “국내 복제약 생동성은 80~125%다. 이조차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수치다. 복제약에 따라 약효의 차이가 크게 나타날 수 있다”며 “노인과 소아, 만성질환자 그리고 다약제 복용 환자는 심각한 부작용과 치료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전문가 “국민 중심 설계 필요” 직역 갈등이 커지면서 제도의 본래 취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날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조원준 더불어민주당 보건복지위 수석전문위원은 “정책 추진의 핵심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먼저 하고 출발해야 한다”며 “지금 문제는 직역 간의 처방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 입장에서는 회의감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준혁 복지부 약무정책과장도 “국민 다수가 성분명 처방을 수용할 수 있다고 응답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우려를 표한다”며 “정책 출발점은 바로 그 우려를 어떻게 해소할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의사·약사·국민이 함께 접점을 찾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는 최근 잦은 품절 사태를 빚은 해열진통제, 항생제 등 필수의약품을 중심으로 성분명 처방을 도입하는 방안을 국정과제에 반영했다. 특정 회사 제품이 동나더라도 동일 성분 의약품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 공급 불안정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이민형 기자 mean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