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인의 안일한 태도 때문에 한국 사회를 떠받치던 전세 제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불안정한 이 시점에서, 전세금을 제때 돌려주지 못하는 임대인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계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대법원이 발표한 '2024 사법연감'에 따르면, 전세금 반환소송 접수건수가 2023년 7789건으로 전년 대비 무려 109.4%나 급증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착각에 빠져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지연은 곧 파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최근 몇 달간 필자의 사무실을 찾는 의뢰인들의 면면을 보면 시대의 단면이 보입니다. 대부분 전세금 반환을 요구하는 임차인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동소이합니다. 계약 만료일이 지났는데도 집주인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미루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임대인들의 사정도 녹록지 않습니다. 집값이 떨어져 매각으로는 전세금을 충당하기 어렵고, 금리 탓에 대출 연장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어려움이 법적 의무를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법률은 명확합니다. 법률에 근거하여 임대차가 종료되면 임대인은 즉시 보증금을 반환해야 합니다.
문제는 지연 자체가 아니라 지연이 초래하는 비용의 기하급수적 증가입니다. 전세금 반환이 늦어지면, 정확히는 목적물을 인도받은 다음날부터 연 5%의 지연이자가 발생합니다. 1억원 보증금 기준으로 한 달에 약 42만 원씩 손해금이 쌓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소송에서 패소했을 때입니다. 소장 부본이 송달된 다음날부터 지연이율이 연 12%로 뜁니다. 같은 1억원 기준으로 월 100만원씩 증가하는 셈입니다. 여기에 소송비용, 변호사 수임료, 강제집행 비용까지 더해지면 임대인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한 사건에서는 8000만원 전세금 반환 지연이 2년간 이어지면서, 최종적으로 임대인이 부담한 금액이 1억2000만원을 넘었습니다. 초기에 성의 있게 협상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손실이었습니다.
법도 전세금반환소송센터의 통계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관리사례 기준으로 전세금 반환소송의 실질적 승소율이 90%를 넘습니다. 평균 소송 기간은 3.9개월, 중앙값은 3.1개월로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됩니다. 86%의 사건이 6개월 이내에 마무리됩니다. 즉, 임대인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고, 패소 가능성은 압도적으로 높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전세금액 중앙값이 9500만원에 달해, 한 번의 패소가 가져오는 타격은 일반인에게는 치명적입니다.
금전적 손실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사회적 신뢰의 추락입니다. 전세금 반환을 지연시킨 임대인들은 이후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워집니다. 공인중개사들도 이런 '문제 건물'은 기피합니다. 단기적 자금난을 피하려다 장기적으로 더 큰 손실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한 임대인은 "집값이 오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2년간 버텼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임차권등기명령에 이어 강제경매까지 진행됐고, 결국 시세보다 30% 낮은 가격에 집을 잃었습니다. 초기에 분할 변제라도 제안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임대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전세금 반환 의무는 피할 수 없는 법적 책임입니다. 둘째, 조기에 적극적 해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분할 변제 합의, 대출이자 분담, 담보 제공 등 다양한 방안이 있습니다. 셋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전세 제도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시스템입니다. 이 제도가 지속가능하려면 임차인과 임대인 간의 신뢰가 전제돼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임대인들의 안일한 태도가 이 신뢰의 근간을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 임대인들은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해법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안일한 기대에 매달려 더 큰 파멸을 자초할 것인가.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결과는 명확합니다.
전세금 미반환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신뢰 시스템의 파괴입니다. 임대인 스스로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만이 한국의 주거 안정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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