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대 움직이는 美…"일본처럼 투자 백지수표 달라" 韓 압박

입력 2025-09-26 17:59
수정 2025-10-10 20:27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한국이 약속한 대미 투자액 3500억달러에 대해 “선불”이라고 못 박으면서 교착상태인 한·미 무역협상이 더 꼬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3500억달러를 일본처럼 현금 위주로 투자하기 어렵다고 버티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인하를 원하면 35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못 박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3500억달러 대부분을 대출이나 보증이 아니라 현금으로 원하고, 투자처도 미국이 선정해야 한다며 사실상 ‘백지수표’를 요구하고 있다. ◇ 늘어나는 美 관세 인하 ‘대가’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핵심 동맹이면서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을 상대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압박을 거듭하고 있다. 일단 일본을 상대로 원하는 성과를 거둔 가운데 한국을 더 밀어붙이는 모습이다. 트럼프 정부가 원하는 관세율 인하의 대가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 때 동행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전날 뉴욕에서 미국이 보낸 양해각서(MOU) 문서에 대해 “당초 합의 때와 다르다”고 했다.

지난 7월 30일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됐을 때 한국 측은 3500억달러 대미 투자액을 대출과 보증을 포함한 것으로 이해했다. 직접 현금을 내놓는 지분 투자는 5% 정도로 한다고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엔 한·미 간 이견이 부각되지 않았다. 미국 측에서도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업 전용 펀드(MASGA 펀드)를 환영했다. 당시 한국은 3500억달러 중 1500억달러를 조선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이견이 드러났다. 미국은 3500억달러에 대해 대부분 현금을 원했고 투자처도 미국 측이 지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日과 같은 조건’ 받아들이라는 트럼프한·미 정상회담은 우호적으로 끝났지만, 이후 한·미 협상은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췄지만 한국은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으면서 여전히 자동차에 25% 관세를 물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측 발언 수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최근 미국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거나 높은 관세를 무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3500억달러는 선불”이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러트닉 장관이 비공개 자리에서 한국 측 관계자에게 3500억달러 중 현금 비중을 높이고, 최종 금액이 일본이 약속한 5500억달러에 조금 더 가까워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선불’ 발언과 WSJ 보도는 이 대통령이 뉴욕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만나 한·미 통화 스와프가 관세협상 타결의 필요조건이라고 한 지 하루 만에 나왔다. 미국이 한국 측 협상 태도나 조건에 불만을 표시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통령은 앞서 미국 측 조건을 받아들였다가는 “탄핵당할 수도 있다”고 했고, 3500억달러를 미국 요구대로 주면 다시 외환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며 미국을 계속 설득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 비교할 때 외환보유액은 3분의 1, 외환시장 규모는 5분의 1 수준에 불과해 외화 조달이 쉽지 않은 데다 준기축통화인 엔화를 보유한 일본과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일본과 이미 합의한 만큼 한국도 비슷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 안팎에선 한·미가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한·미 통화 스와프, 대미 투자액 중 현금 투자 비중, 투자 프로젝트 선정 방식 등 세 가지에 관해 이견을 어떻게 좁히느냐가 협상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