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新여성, 구투에 저항하다

입력 2025-09-25 16:50
수정 2025-09-26 02:11

문학 교과서에서 배웠을 법한 이름이다. 잡지 공모전 당선, 그러니까 이른바 ‘등단’이라는 제도로 문단에 등장한 최초의 한국 여성 작가다. 시인이자 소설가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동갑으로, 이광수 최남선 등과 동시대에 작품 활동을 했다.

수필가, 극작가로도 활동했다.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였고, 신문기자였다. 그의 이름은 김명순(金明淳). 그럼에도 아직 낯선 이름이다. 韓 여성 작가 최초 단행본 출간
올해는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김명순의 작품집 <생명의 과실>이 출간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책은 한국 서지 기록에 등록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이다. 머리말에 김명순은 이렇게 적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열매로 세상에 내놓습니다.” 첫 책을 내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왜 고통을 울부짖었을까.

1896년 평양 지주 김희경의 딸로 태어난 그는 신여성의 상징, 당대 문단의 아이돌이었다. 서울 진명여학교(현 진명여고)와 일본 유학 등을 통해 신식 교육을 받았다.

1917년 최남선이 창간을 주도한 월간지 ‘청춘’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며 ‘한국 최초의 등단 여성 작가’가 됐다. 한국 현대소설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된 해와 같은 연도다. 내용도 기념비적이다. 구시대 가부장사회의 축첩 제도를 비판적으로 그렸다. 옛이야기의 전형적인 ‘권선징악’ 결말을 탈피해 당시 심사를 맡은 이광수가 “교훈적이라는 구투(낡은 방식)를 완전히 탈각한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아명인 ‘탄실’을 비롯해 ‘망양초’ ‘별그림’ 같은 필명으로 시, 소설, 산문, 평론, 희곡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다. <생명의 과실>에 이어 <애인의 선물>을 펴냈다. 시대가 학대한 여성 작가많은 ‘최초’가 그렇듯 질시와 폄하의 대상이었다. 기생의 딸이라는 소문, 결혼하지 않고 자유연애를 주창한 파격적인 당시 행보가 추문의 빌미가 됐다. 데이트 성폭력 피해마저 모욕적 소문으로 부풀려졌다. ‘매일신보’의 남성 동료 기자들조차 성희롱을 일삼았다. 방정환, 김동인 등 당대 남성 작가들은 김명순에 대한 근거 없는 조롱을 담은 글을 발표했다. 그렇게 쓰인 소설 중 하나는 지금도 해당 작가의 전집에 실려 있다.

김명순은 반박문을 내거나 작가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며 적극 대응했다. 아명을 딴 ‘탄실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내세운 <탄실이와 주영이>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신들은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운명을 비웃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지경에 겨우 이르렀어도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김명순 수필 ‘대중없는 이야기’)

당대에 김명순은 스타 작가였다. 신작을 발표하면 전달에 광고가 실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사망 연도, 유해 묻힌 장소조차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51년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마저도 설이 분분하다.

시대가 김명순을 학대했다. 김명순은 시 ‘유언’을 통해 말했다. “죠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때/ 개천가에 곡구러젓든지 들에 피 뽑앗든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 수만 잇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믜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김명순과 나혜석, 김일엽은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난 1세대 근대 여성 작가다.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이나 후손이 있는 나혜석과 달리 김명순은 그 성취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후배 여성 문인들 사이에서는 뒤늦게 그에게 이름을 되찾아주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소설가 김별아는 2016년 김명순의 삶을 그린 장편 <탄실>을 냈고, 시인 박소란은 김명순의 작품을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올해 7월에는 김명순의 작품 속 매력적인 문장을 추려 소개하는 문장집 <사랑하는 이 보세요>를 엮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