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3단계 비핵화론’에 이어 ‘END 이니셔티브’를 제시하며 현 정부의 대북·한반도 정책 구상이 완성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로 구성된 END를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공개했다. 일부 전문가는 이 대통령의 해법을 두고 현실적이라고 평가했고, 일부는 북한의 핵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李 “교류는 평화의 지름길”
24일 외교·통일 분야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이 비핵화에 앞서 교류 및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END를 제시한 것은 북한이 비핵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현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는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돼야 교류 및 관계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못 박았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비핵화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류 및 관계 정상화와 비핵화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게 이 대통령의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 대화로 한반도에서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며 “우리 정부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의 길을 일관되게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교류와 협력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굴곡진 남북관계의 역사가 증명한 불변의 교훈”이라며 교류 분야에 힘을 싣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비핵화에 대해선 “엄중한 과제임에는 틀림없지만 단시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냉철한 인식의 기초 위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언급했다.
이날 밝힌 END는 앞서 공개한 3단계 비핵화론보다 더 포괄적인 구상을 담고 있다는 게 정부 내 평가다. 중단과 축소, 비핵화로 이어지는 3단계 비핵화론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END는 대북 관계 전반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전문가 평가는 엇갈려이 대통령의 END 구상을 두고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김상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날 북한연구학회와 통일부가 공동 개최한 ‘북한의 2국가론과 남북기본협정 추진방향’ 세미나에서 “남북이 두 국가가 되고 단절된 채로 계속 지낸다고 해서 저절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며 이 대통령의 구상을 지지했다. 황수환 제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평화통일 원칙을 계승해 지속·일관적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어 END 구상이 현실적으로 추진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정은은 최근 “우리는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이 없으며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안경모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는 “현재 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다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관계 정상화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미·북 협상도 언제 실현될지 미지수다.
자칫하면 END 구상이 북한 비핵화를 후순위로 미뤄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특히 외교가에서 ‘관계 정상화’는 수교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대통령의 제안이 미·북 수교를 비핵화보다 우선적으로 추진하자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종원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핵이 용인되면 미국의 확장억제 신뢰가 무너져 동북아시아 각국이 잇달아 핵무장하는 ‘핵 도미노’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END 구상은 세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것이지 비핵화보다 교류를 먼저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세 가지 요소는 각각 하나의 과정이고, 우선순위와 선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며 “교류, 관계 정상화, 비핵화 등 과정이 상호 추동하는 구조를 추진해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현일 기자/뉴욕=한재영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