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집이 예술의 무대가 된다면? 집을 내어주거나, 집처럼 꾸미거나, 집을 재해석한 전시가 서울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태원동부터 한남동, 약수동, 성수동까지 트렌드세터들이 즐겨 찾는 동네다. 9월 첫 주 아트위크에 문을 열고 작품이 된 ‘남의 집’을 찾아가보자.
미국의 한 베스트셀러 작가에겐 집필 습관이 있다. 집을 박차고 나와 달랑 침대 하나뿐인 호텔 방에서 글을 쓴다. 집은 누구에게나 가장 편안한 공간이지만, 이 안락함이 때론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친숙한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만나는 경험은 창작의 틀을 넓힐 좋은 기회. 예술가에게 작품 활동을 위해 특정한 공간을 제공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Artist Residency) 프로그램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90일간의 안빈낙도-리빙룸 마이알레
아무런 접점 없는 세 남자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세 달간 동거를 시작했다. 동고동락의 끝은 2025 서울 아트 위크 기간에 진행한 <Welt | My allee: me, meme ? 세기말의 안빈낙도> 전시로 이어졌다. 가구 디자이너 김민재, 공예 디자이너 이규한, 코드 기반 아티스트 최건혁은 2층짜리 단독주택 ‘리빙룸 마이알레’에서 실제로 거주하며 협업 작품을 선보였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 “우리는 계속 세기말에 살고 있었다”는 문장이 이들의 아이디어를 자극했다. 언젠가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공유한 이들은 ‘서울 도심 한복판의 화려한 주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 삶을 차단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이 그 결과물이다.
누군가 사람이 살던 공간인 만큼, 세 작가는 입주하자마자 집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았다. 괘종시계부터 조명, 의자, 침대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작품이 가구 형태를 띠는 이유도 그래서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작품은 ‘이태원 간판 조명 7-1-25’. 이규한 작가가 이태원 일대의 간판을 직접 촬영한 사진을 한지를 활용해 만들었다.
1층 중앙에는 세 사람이 함께 작업한 병풍 모양의 작품 ‘강 건너 불’이 창가를 장식한다. 때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는 자세로 살아야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작가들의 생각이 담겼다. 밤이면 창문 밖 풍경과 작품이 어우러져 정말로 불난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각자의 개성을 담은 방이 3개 나온다. 레지던시가 끝난 후 세 아티스트는 집을 떠났어도 최건혁 작가의 방 ‘아바타’에는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 머물러 있다. 방바닥에서 움직이는 작가의 아바타가 이 방을 지킨다.
최 작가는 이 방에 달려 있는 다락방에 사후 세계도 표현했다. 어린 시절 다락방에 무시무시한 귀신이나 괴물이 살 것 같다는 상상을 했고, 이를 1500장의 타일로 구현해냈다. 바로 옆은 이규한 작가의 ‘스틸 본즈 룸’.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하수구 덮개를 이용해 가상의 도시 공간을 만들었다. 이태원이 사라져도 해밀턴 호텔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유 끝에 방의 창문에 호텔 사진을 인화해 걸었다.
‘누워서 천장을 감상하는 방’이라는 뜻의 ‘운망정’은 김민재 작가가 꾸민 세계다. 방문은 반쯤 잘려 있어 들어설 때부터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야 한다. 내부 역시 천장에 설치된 작업물 때문에 층고가 낮다. 자연스레 움츠린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공간. 작가는 도시가 품은 ‘긍정적 중압감’을 느끼도록 의도했다.
하지만 목침을 둔 평상과 작가가 ‘김 같은 침대’라고 이름 붙인 침대에 누우면 이 압박감은 눈 녹듯 사라진다. 금세 안빈낙도의 삶에 빠져든다. 실제로 김민재 작가는 프로그램이 종료된 이후에도 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등 생활을 계속했다. 관람객은 창작 과정과 일상의 흔적을 함께 경험한다.
다름의 공존으로 조율한 앙상블-라니서울
프랑스 출신 작가 앙투안 카르본(Antoine Carbonne)과 소피 바랭(Sophie Varin) 커플은 한 달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라니서울’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서울은 그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동대문 종합 시장에서 만난 한복 원단은 캔버스가 됐고, 산더미처럼 쌓인 재래시장의 나물은 작품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스토리를 탄생시켰다. 라니서울이 처음 선보인 크로스컬처럴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젝트다.
대사관이 즐비한 한남동 언덕길에 자리 잡은 라니서울은 주택을 개조한 갤러리 겸 아트 스페이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 <자아들의 앙상블: 네 명의 작가와 그 너머>는 8월 30일부터 9월 26일까지 약 한 달간 이어졌다. 전시에는 두 작가뿐 아니라 한국의 장종완·추미림 부부도 참여해 서로 다른 예술적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나눴다.
유사한 화풍을 공유함으로써 만들어내는 화음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공존하며 어우러진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이 전시의 묘미. 4명의 작가는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 맞닿아 있거나 반대되는 모습을 공유한다. 앙투안과 장종완 두 작가는 상상의 세계를 유영하는 장면을 구성했다.
화풍은 다르지만 그 주제가 일맥상통한다. 주로 벽화 작업과 같은 대형 회화를 선보이는 앙투안과 달리 소피의 작품은 매우 조그맣다. 초소형 화면에 오밀조밀하게 구축한 서사를 담은 미니어처 유화가 소피의 대표작.
장종완은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동물과 융화된 인간, 풍경화된 사물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추미림은 도시 풍경과 일상의 장면을 미니멀하게 표현한다. 픽셀과 그리드를 활용해 기억과 감정을 냉소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지만, 두 연인이 선보이는 작품은 사뭇 상반된 모습이다.
낯선 집주인과의 취향 교집합-취향가옥 2
아예 가상의 집을 만든 곳도 있다. 서울 성수동 디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취향가옥 2: Art in Life, Life in Art 2>는 대놓고 남의 집에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해보라’고 제안한다. 누군가의 집을 옮겨온 듯 화장실까지 구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디뮤지엄 하유리 큐레이터는 “미술관의 이미지는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이트 큐브가 대표적인데, 집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통해 작품이 일상에 들어오면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총 3개 층에서 진행하는 전시는 층마다 집의 형태가 달라 다양한 주거 환경 속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게 한다. 단차를 두고 용도를 구분한 M2층 스플릿 하우스Split House와 햇살이 내리쬐는 테라스가 달린 M3층 테라스 하우스Terrace House, 복층형 집인 듀플렉스 하우스Duplex House 등 집에 대한 각자의 취향을 탐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11월 개관 10주년을 맞아 열린 <취향가옥: Art in Life, Life in Art>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10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어 다시 돌아오게 됐다. 차이점이 있다면 페르소나의 설정이다. 시즌 1에서는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영상감독과 단아함을 선호하는 티 소믈리에 엄마가 함께 사는 집’, ‘자연과 건강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둔 플로리스트 아내와 셰프 남편의 취향이 녹아든 공간’과 같이 매우 구체적인 페르소나가 각각 집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설정이 관람객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반영해 시즌 2에선 공간의 콘셉트를 색이나 단어로 정리했다. 베이지와 브라운 톤의 공간에서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는 M2의 콘셉트는 ‘모카 무스(Mocha Mousse)’, 모노톤의 작품과 어우러진 고요하고 정제된 감성의 M3층은 ‘셀프 리추얼(Self Ritual)’, 팝한 컬러감과 유쾌한 큐레이팅이 돋보이는 M4의 콘셉트는 ‘레트로 퓨처(Retro Future)’다.
“집은 삶의 보물 상자여야 한다”고 말한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말을 문자 그대로 실현한 듯 이곳은 눈길 닿는 곳마다 진귀한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백남준·김창열·이우환 등 미술계 거장은 물론 조르주 루스와 올라푸르 엘리아손, 장 프루베 등 사진작가와 설치 미술가,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 아티스트 90여 명의 작품 800여 점을 전시한다.
컬렉터들의 소장품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이번 전시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하우스마다 조성한 ‘컬렉터스 스팟(Collector’s Spot)’ 섹션이 전시의 다채로움을 끌어올린다.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곰돌이 푸, 스누피 등의 캐릭터가 환하게 웃고 있는 넥타이 80여 개와 미니카, 서프보드, 카우스와 무라카미 다카시 등 서브컬처 및 팝아트 아이콘과 관련된 희귀 수집품 총 600여 점을 처음 공개한다. 전시는 내년 2월 22일까지 이어진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