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든 여행자들, 제주에서 ‘놀멍 쉬멍 일하멍’

입력 2025-09-26 06:04
수정 2025-09-26 10:32
[비즈니스 포커스]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15분. 1980년대 신혼 여행객으로 붐볐던 제주시 탑동 거리에 지금은 캐리어 대신 맥북을 든 사람들이 몰려든다.

바다 옆 러닝 코스와 감성 카페들 사이 ‘맹그로브 제주시티’가 있다. 단순한 숙소라기보단 일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지난 9월 18일 1박 2일간의 워케이션을 체험하러 이곳을 찾았다.

한때 신혼여행지가 워케이션 성지로

맹그로브 제주시티는 한때 제주 서울관광호텔로 불렸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부동산 임팩트 디벨로퍼 엠지알브이(MGRV)가 운영하는 워크 앤 스테이 브랜드 ‘맹그로브’는 이미 강원도 고성에서 ‘몰입형 일터’를 성공시킨 바 있다.

제주시티는 그 2호 지점으로 이번엔 ‘영감을 주는 공간’이란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객실은 휴식과 업무 두 가지 목적을 충족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휴식을 위한 침대와 업무를 위한 넓은 책상, 데스크 매트, 조명, 다양한 위치의 콘센트까지 갖춰져 있다.

회의는 24시간 개방된 워크 라운지에서 하면 된다. 이곳은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뿐 아니라 팀 단위 워크숍, 프로젝트 회의 장소로도 적합하다. 워크 라운지에는 82석 규모의 좌석, 모션 데스크, 블루투스 키보드, 프라이빗 부스, 복합기, 대형 회의실이 있다.

워크 라운지뿐만 아니라 조식과 해피아워를 제공하는 캔틴, 루프톱 테라스, 라운지 소파, 예술 전시까지 업무와 휴식 사이의 경계를 부드럽게 허무는 다양한 시설이 구비돼 있다.







“프리랜서에겐 사무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게 항상 고민이었는데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조용한 분위기, 완비된 인프라, 바다 전망까지 있어 앞으로의 출장지는 여기가 될 것 같아요.” 리모트워크를 위해 제주시티를 찾은 프리랜서 L 씨의 말이다.

회사 팀 단위 방문객도 늘고 있다. 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직장인 S 씨는 이렇게 말했다. “1박 2일 회의 일정이었는데 워크 라운지와 8인 회의실을 넘나들며 논의할 수 있었어요.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창문 위치에 모니터 화면도 선명하고 블루투스 키보드로 작업하는 환경이 정말 쾌적했어요.”

러닝·쇼핑·감성 피맥…“퇴근 후가 더 특별하죠”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제주시티의 매력은 낮보다 밤에 더 선명해진다. 업무를 마치고 해안선을 따라 러닝을 하거나 루프톱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그 시간과 여유가 이 공간의 진짜 가치를 보여준다.

인근에는 감성 피맥 맛집 ‘맥파이’, 로컬 해산물과 특산물로 가득한 동문시장, 그리고 SNS 명소인 셀프 사진관까지 도보 10분 내외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가득하다.

“낮에는 업무에 집중하고 저녁엔 쇼핑과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이상적인 워케이션이었어요. 인근에 동문시장이 있어 먹거리도 다양하고 러닝과 농구도 할 수 있는 공간이 근처에 있어 취미생활 즐기기에도 딱이었어요.” 아내의 태교 여행을 겸해 방문한 개발자 J 씨의 말이다.

도보나 전기자전거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탑동 해안선, 동문시장, 이호테우 해변 말 등대가 있다. 제주시티 관계자는 이용객 중에 매일 아침, 저녁 ‘GPS 러닝’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한라산 모양의 러닝 코스를 따라 뛰는 ‘한라산 런’,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하는 아트 클래스와 커피 워크숍까지. 일과 삶이 단절되지 않고 맞물리는 체류형 설계가 돋보였다.








기업도 반했다…B2B 시장 본격 공략

제주시티의 핵심 타깃은 여행객뿐만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B2B(기업 단위) 수요를 끌어들이고 있다. 기업들의 관심도 뜨겁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23년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90%가 워케이션을 희망했고 가장 선호하는 지역으로 제주도(32%)가 꼽혔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로컬 체류형’ 워케이션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다. 이 흐름을 타고 맹그로브 제주시티는 제주 워케이션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개장 이후 평균 객실 점유율은 82%, 올해 4월부터는 매월 90%에 육박할 정도다.

주목할 점은 주중·주말 가릴 것 없는 고른 수요다. 단기 체류뿐 아니라 5박 이상 장기 체류 고객도 늘고 있다. 특히 전체 고객의 10% 이상이 기업 단위로 방문할 정도로 B2B 수요가 눈에 띄게 성장 중이다. IT·콘텐츠 등 유연한 근무 문화가 정착된 업계 중심이다.

“과거 워크숍은 세미나 후 다 같이 식사하고 잠자는 식이었죠. 이젠 업무는 딱 정해진 시간에만, 이후엔 자유롭게 제주의 매력을 즐기는 형태로 바뀌었어요.” 정해선 맹그로브 워크 앤 스테이 제주시티팀 팀장의 설명이다.

그는 “제주국제공항과 가까운 거리에서 업무와 여가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었는데 제주시티가 그 빈틈을 채웠다”고 강조했다.

이제 엠지알브이는 다음 단계를 준비 중이다. ‘워크숍 토털 패키지’를 곧 출시할 예정이다. 항공권, 제주 지역화폐 ‘탐나는전’, 로컬 상권과 연결된 체험 프로그램 등이 포함될 계획이다. 복지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고자 하는 기업들의 니즈를 겨냥한 B2B 전략이다.






제주, 워케이션 실험장으로 변신 중

회사 워크숍으로 방문한 직장인 K 씨는 “아침에 바닷가 러닝하고 7층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업무를 시작하면 완전히 리셋된 기분”이라며 “공항이 가까워 덜 피곤하고 조용하고 깔끔해서 재방문 욕구가 생긴다”고 말했다.

탑동은 파타고니아, 살로몬, 헬리녹스, 올버즈 같은 브랜드 매장과 동문시장, 올리브영, 해안 카페 거리까지 도보 생활권 안에 들어와 있어 MZ세대 직장인의 만족도가 높다. 제주도는 이 같은 흐름을 산업 차원에서 반영하고 있다.

2026년까지 연간 10만 명(참가자 5만 명+동반자 5만 명)의 워케이션 인구 유치를 목표로 삼고 있으며 외국인 무사증(무비자) 제도, 디지털 노마드 비자 추진, 로컬 연계 체험 확대 등을 계획 중이다. 글로벌 워케이션 허브로 도약하기 위해 지난 6월에는 프랑스 유네스코 본부에서 국제직원협회와 워케이션 활성화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정책은 ‘워케이션 ESG 인센티브’ 제도다. 기업이 제주에서 일정 기간 워케이션을 진행하며 해변 플로깅이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제주도가 ‘제주 워케이션 ESG 활동 확인서’를 발급한다. 이는 기업의 ESG 경영 실천을 증빙하는 자료로 각종 평가에서 가점이 주어질 수 있다.

실제 사례도 나왔다. 동원F&B는 지난 4월 맹그로브 제주시티에서 워케이션 중 표선해변에서 플로깅을 진행해 ‘1호 ESG 인증 기업’이 됐다.

“고성 지점이 ‘몰입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제주시티는 ‘영감을 주는 공간’입니다. 기업, 프리랜서, 로컬 커뮤니티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도 지역과 연계한 고객경험 확장을 통해 B2B 고객과 지역경제를 함께 연결하는 워케이션 거점으로 키워갈 겁니다.” 정해선 팀장은 말했다.

최근 정부가 주 4.5일제 도입을 위한 예산을 편성하고 관련 입법을 추진하는 등 근무 환경 변화에 속도를 내면서 워케이션 시장은 한층 더 활성화될 전망이다. 제주 워케이션은 단순한 ‘여행과 업무의 결합’을 넘어 새로운 근무 방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