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 쓰나미' 오나…로펌 문 두드린 은행들

입력 2025-09-23 17:49
수정 2025-09-24 01:35
국내 A은행은 최근 정부의 보이스피싱 근절대책을 적용하는 방안을 두고 논의가 한창이다. 소비자보호 담당 임직원들이 수시로 모여 보이스피싱 차단을 위해 필요한 내용과 정부 대책의 문제점 등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이 은행 관계자는 “과실이 없어도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문제”라며 “해당 내용이 최대한 합리적으로 법제화되도록 하는 방안과 소비자의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본인 확인 절차 등을 강화하는 방안을 두고 고민 중”이라고 설명했다.

◇“피싱 범죄자에게 천국 열릴 수도”이 같은 우려는 A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은행연합회가 대형 로펌인 화우의 법률 조언까지 받아 가면서 정부의 보이스피싱 근절대책의 적법성을 따져보는 이유다. 주요 은행은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무과실 배상 책임’ 원칙에 관한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과실 배상 책임은 보이스피싱 범행에 쓰인 계좌를 관리한 금융사가 피해액의 일부나 전부를 일차적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지난달 보이스피싱 근절대책을 발표하면서 이 같은 원칙을 법제화하기로 했다.

정부 발표 후 은행권에선 “무조건 배상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경제관료 출신의 금융권 관계자는 “범죄자는 따로 있는데 제3자가 배상하는 것은 일단 민법의 기본원칙에도 위배된다”며 “사실상 보이스피싱과 관련한 모든 책임을 은행이 부담하도록 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허위로 피해 사실을 꾸며 배상받는 신종 사기가 잇따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무과실 책임 원칙에 관한 법률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다면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며 “여러 사람이 공모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속여 배상받는 게 가능하면 범죄자에게 천국이 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보안 강화에 송금 불편해질 수도은행들은 배상 책임이라는 초강력 규제가 과도한 보안 강화로 이어져 금융소비자의 편의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보이스피싱 모니터링 인력을 늘리고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송금 절차가 복잡해지고 요건도 까다로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은행권 관계자는 “배상을 막으려면 범죄 가능성 자체를 최대한 차단해야 하고, 그러려면 특정 연령만 허용하는 등 송금 자체를 이전보다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금융시스템이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무과실 배상 책임에 반대하는 것과 별개로 보이스피싱 예방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속해서 범죄를 막기 위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은 최근 보이스피싱 모니터링 인원을 대폭 늘리고, AI가 수상한 거래 유형을 미리 파악해 계좌 지급정지 등의 조치를 하도록 모니터링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 본인 인증 절차에 안면 인식을 포함하도록 하는 사례도 느는 추세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