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커버 스토리 - 거버넌스 빅뱅
일본이 ‘형식적 규제 준수’에 머물던 지배구조 개혁을 실질적 실행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베노믹스 시절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원칙)와 거버넌스 코드(기업지배구조 원칙)가 10년간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면, 이제 금융청과 거래소, 연기금이 주도하는 ‘액션 프로그램 2025’는 투자자와 기업, 시장 인프라를 잇는 새로운 지배구조 사슬을 만들고 있다.
일본 금융청은 지난 6월 ‘기업 지배구조 개혁의 실질화를 위한 액션 프로그램 2025’(이하 액션 프로그램)를 발표했다. 투자자와 기업이 ‘긴장감을 바탕으로 한 신뢰’ 속에서 건설적 대화를 이어가도록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고, 기업의 ‘가치 창출 능력’을 높여 중장기적 기업가치 향상과 지속적 성장을 도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여기서 ‘긴장감을 바탕으로 한 신뢰 관계’는 견제와 감시가 작동하는 가운데 장기적 관계와 상호 이해를 전제로 형성되는 신뢰를 뜻한다.
지금까지 정비된 제도를 실질적 실행과 경제성장 전략으로 연결하는 종합 로드맵으로, 일본 경제의 질적 성장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액션 프로그램 2025를 ‘지금까지의 지배구조 개혁을 종합적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행동 계획’으로 규정한 만큼 지난 10여 년간의 성과와 한계를 종합해 제도와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전개는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지배구조 개혁은 이미 2013년 아베노믹스 성장 전략에서 출발했으며, 10년 이상 제도적 기반을 다져 오늘날의 ‘형식에서 실질로’ 실행 단계에 이른 것이다.
1단계 - 기반 구축
기업과 자본시장 연결
아베 2차 정권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기부양책이 아니라 지속적 성장성을 담보할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 핵심 수단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제시했다. 자본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가치 제고를 통해 일본 경제 전체에 선순환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와 2015년 거버넌스 코드가 일본 금융시장에 등장하게 됐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의 수탁자책임을 명문화하고, 투자자가 단순한 자금 운용자가 아니라 기업과의 대화를 통해 장기적 기업가치를 높여야 할 주체임을 제도적으로 규정했다. 이어 도입된 거버넌스 코드는 이사회 독립성 강화와 자본 효율성 제고를 요구하며, 기업이 자본비용을 의식한 경영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했다. 두 제도는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며 일본 자본시장의 중심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양대 코드는 관련 가이드라인과 함께 개정·보완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7년 개정에서 이해 상충 관리와 대화 절차를 구체화했고, 2020년 개정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고려, 협동적 기업과의 인게이지먼트를 제도에 반영했다. 거버넌스 코드는 2018년 개정에서 정책 보유 주식 축소와 자본비용 인식을 강조했고, 2021년 개정에서는 프라임 시장 상장 요건 강화, 사외이사 독립성 확대, 그리고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기반 기후 공시가 포함됐다.
금융청이 제정한 ‘기업?투자자 대화 가이드라인’은 2018년 책정되어 대화 의제와 절차를 명문화해 실질적 대화를 촉진했고, 2021년 개정판에서는 대화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투자자?기업 간 협치 문화를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단계 - 전환점
‘주가와 자본비용을 고려한 기업경영’을 펼쳐라
2023년 3월 일본거래소그룹(JPX)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주가와 자본비용을 고려한 경영’을 실천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JPX는 프라임 시장 상장사의 절반 이상이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를 밑도는 현황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이 자본비용을 인식하고 투자자와의 대화를 통해 개선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도록 요청했다. ‘거버넌스 코드 준수 여부’에 대한 형식적 체크리스트를 넘어 ‘기업전략의 핵심에 자본 효율성과 기업가치 제고를 반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후의 제도 개정과 액션 프로그램은 모두 이 흐름과 궤를 같이하며, 형식적 준수에 머물던 개혁을 ‘실질적 실행과 정착’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에 이번 요청을 기점으로 2014~2021년까지 일본 지배구조 개혁의 제도적 토대가 마련된 1단계, ‘실질적 실행과 가치 창출’로 나아가는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3단계 - 제도 발전
투자자-기업-시장 유기적 연결
거래소의 요구 이후 일본 지배구조 개혁은 투자자?기업?자산 오너?시장 인프라?법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금융청의 ‘액션 프로그램’이 있다. 2023년판은 ‘형식에서 실질로’ 전환을 선언하며 자본 효율, 이사회 기능, 공시 투명성을 3대 축으로 제시했다. 2024년판은 영문 공시 확대와 가시성 지표 도입으로 글로벌 투자자와의 대화 수준을 높였고, 2025년판은 지난 10년간 축적된 성과를 정착·심화하는 로드맵 성격을 띤다. 이 안에는 스튜어드십 코드 3차 개정, 거버넌스 코드 개정 준비, 회사법 개정, 공시 인프라 디지털화가 포함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2025년 개정을 통해 책임 범위를 운용사에서 연기금·보험사 등 자산 소유자까지 확장했다. ESG 반영과 협동적 대화를 강조하며 투자자 책임을 제도화하고, 기업과의 ‘대화’ 무게중심을 넓혔다. 거버넌스 코드(2026년 개정 예정)는 PBR 1배 미만 기업 개선 요구, 이사회 독립성 강화, ISSB 기반 기후·비재무 공시 도입을 예고한다.
2024년 제정된 ‘자산 소유자 원칙(Asset Owner Principle, AOP)’은 연기금·보험사에 수익자 이익 최우선, 위탁운용 관리, ESG 고려, 이해 상충 관리, 인게이지먼트 책임 등 5가지 원칙을 부여했다. 특히 자산 소유자를 단순한 자금 제공자가 아니라 기업과 직접 대화하는 주체로 규정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AOP 선언을 한 일본의 자산 소유자들은 해당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를 이어나가고 있다.
경제산업성(METI)의 ‘가치 창출 능력(CG 가이던스·2025)’은 TOPIX500 기업에 이사회 기능 강화, 경영진 전문성 확보, 자원 배분 최적화, 평가·검증 메커니즘 구축 등을 요구한다. 또 회사법 개정(2025 예정)은 무상 주식 교부, 비대면(virtual-only) 주총 허용, 실질 주주 확인 제도 도입 등을 포함해 자본조달, M&A, 주총 운영의 현대화를 추진한다.
결국 일본의 지배구조 개혁은 원칙(코드)?실행(가이던스)?법제(회사법)가 다층적으로 맞물리며 ‘투자 가치사슬(investment chain)’을 완성해가고 있다. 각 제도가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계돼 기업 행동 변화를 이끌고, 시장 전반의 신뢰와 효율성을 높이는 구조로 자리 잡고 있다.
실행 이끄는 세계 최대 연기금 GPIF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 공적연금(GPIF)은 투자 연결 고리가 제도적 구상에 머물지 않고 실제 운용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다음 GPIF의 활동은 거버넌스 코드, 스튜어드십 코드, AOP(자산 소유자 원칙), 거래소 요구, 회사법 개정 등 제도적 틀을 ‘자산 소유자의 실행’으로 연결해 일본 경제 선순환 구조(기업가치 제고 → 투자 확대 → 성장률 개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GPIF는 2025년 3월, 2025~2030년 중기 목표에 맞춘 첫 ‘지속가능성 투자 방침’을 발표했다. 이번 방침은 단순한 재무 성과를 넘어 기업활동이 초래하는 환경적·사회적 영향을 고려하고, 사회적·환경적 리스크 관리가 장기 수익 확보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명확히 했다. 이를 위해 GPIF는 기업과의 대화, 의결권 행사, ESG·지속가능성 리스크 분석, ESG 지수 투자 확대를 병행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금융청의 ‘액션 프로그램 2025’가 내세운 ‘형식에서 실질로’ 전환 요구와 자산 소유자 원칙(AOP) 제5원칙인 ‘에셋 오너의 대화 책임’을 구체화한 것이다.
같은 해 GPIF는 ESG 지수 평가 방식을 개편해 업종 내 상위 50% 기업만을 편입하도록 기준을 강화했다. 기존 9개의 ESG 지수(총 약 17조8000억 엔, 전체 자산의 약 14%) 외에도 신규 지수 선정을 계획하고, 기존에 리밸런스 대상에서 제외한 ESG 지수 투자를 국내외 주식으로 확대했다. 이는 일본거래소(JPX)의 ‘자본비용을 고려한 경영’ 요구와 맞물려 시장 전반의 질적 개선과 자본 효율성 제고와 방향성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GPIF는 2017~2022년 국내 주식 위탁 21개 펀드와 2만6792건의 대화, 4만8077건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업과의 대화 효과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이사회 구조, 공시, 기후변화 대응, 여성 임원 비율, 온실가스 감축목표 등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개선이 확인됐다. 제도적 원칙(스튜어드십 코드, AOP)이 실행(GPIF 위탁운용사의 인게이지먼트)으로 구체화되고 성과(기업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 ‘투자 사슬’의 선순환 구조가 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난 셈이다.
2024년에는 토픽스500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과 인터뷰를 진행해 위탁운용사의 보고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 기업과의 대화 내용을 확인하며 피드백을 반영하는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했다. 이는 금융청 액션 프로그램의 ‘투명성과 책무성 강화’ 원칙과 맞닿으며, 자산 오너가 대화의 직접 주체로 등장해 스튜어드십 활동의 실효성과 신뢰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 나아가 GPIF는 ESG 투자를 시작한 초기 단계부터 일부 위탁운용사와 함께 ‘패시브 전략+대화(인게이지먼트) 결합 운용 모델’을 도입해 단순 지수 추종을 넘어 기업지배구조와 공시 개선 등 시장의 구조적 과제 해결을 촉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투자자?기업 대화 활성화 → 기업가치 개선 → 시장 전반의 질적 고도화라는 선순환 구조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며, 일본 지배구조 개혁이 실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지배구조 개혁, 경제성장과 연결돼야
아베 2차 정권 성장전략을 배경으로 시작된 지배구조 개혁은 투자자(SS Code)?기업(CG Code)?자산 오너(AOP)?시장 인프라?법제로 이어지는 투자 사슬을 구축하며 투자자와 기업의 상호 신뢰 회복을 기반으로 중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를 넘어 자본시장 고도화와 경제 성장으로 연결되는 방향성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 중심 경제·금융 구조를 고려할 때 일본 사례를 그대로 반영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를 수 있다. 다만, 단기 성과 중심의 주주환원 논의에서 벗어나 기업과 투자자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협력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마련하는 과정을 참고하는 것은 자본시장 고도화와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한국형 로드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진아 오릭스생명보험 디렉터(스페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