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이 보유 중인 시가 70조엔(약 660조원) 상당의 상장지수펀드(ETF)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부터 금융 완화와 주가 부양을 위해 사들인 물량이다. 지난해 기준금리 인상과 마이너스 금리 해제, 국채 매입을 줄이는 ‘양적 긴축’에 나선 데 이어 ETF 매각이라는 ‘질적 긴축’까지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적·질적 완화’(QQE)로 불리는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편 일본이 금융 정상화로 가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은행은 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보유 중인 ETF와 부동산투자신탁(REIT)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행이 보유한 ETF는 올해 3월 말 기준 장부가 37조엔, 시가 70조엔 규모다. REIT는 장부가 6500억엔, 시가 7000억엔에 이른다. 시장에선 일본은행이 작년 3월 긴축에 들어가면서 언제, 어떻게 ETF와 REIT를 처분할지 주목하고 있었다.
일본은행은 ETF를 장부가 기준으로 연간 약 3300억엔, 시가로는 연간 약 6200억엔어치 팔기로 했다. 시장 전체 매매대금에서 차지하는 ETF 매각대금 비중을 0.05% 정도로 잡았다. REIT도 같은 비중으로 매각해 장부가 기준 연간 약 50억엔, 시가 기준 연간 약 55억엔 팔아치울 전망이다. 매각 속도는 변할 수 있으며 시장 상황에 따라 일시 중단할 수도 있다.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매각을 개시할 예정이다.
일본은행은 2010년부터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으로는 이례적으로 ETF를 사들였다. 2012년 말 재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는 2013년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차원이 다르다’는 의미의 이차원(異次元) 완화를 내걸고 일본은행을 통해 이른바 ‘바주카포 머니’를 쐈다. 무제한으로 국채를 매입해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을 억제(YCC)하고,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으며 ETF 매입까지 동원했다.
꿈쩍 않던 일본의 물가가 들썩이기 시작하자 일본은행은 금융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해 3월 17년 만에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2016년부터 이어온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기했다. 작년 8월부터는 국채 매입 시 분기 단위로 월 매입액을 4000억엔씩 줄이는 양적 긴축을 시작했다. 이제 ETF 매각까지 결정하며 질적 긴축에 나선 것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사진)는 그동안 ETF 매각에 대해 “시간을 들여 검토하겠다”는 방침을 거듭했다.
일본은행이 ETF 매각에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주가 하락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닛케이지수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자 ‘ETF를 팔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날 닛케이지수는 ETF 매각 결정 여파로 전날보다 0.57% 하락한 45,045에 마감했지만 시장의 우려가 과도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부 처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에다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단순 계산으로 100년 이상 걸린다”며 “시장 혼란을 피하기 위해 조금씩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은 이날 기준금리를 연 0.5%로 동결했다. 올해 1월 연 0.25%에서 연 0.5%로 올린 뒤 다섯 차례 연속 동결했다. 미국 관세 정책의 영향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시장에선 일본은행이 이르면 오는 10월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봤다.
도쿄=김일규 특파원/최만수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