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가 현대의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 중 하나는 영화음악이다.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지낸 지휘자 존 마우체리는 “낭만주의 오케스트라의 음악어법이 코른골트를 비롯한 작곡가들에 의해 영화음악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현대 대중들이 말러를 비롯한 후기낭만주의 음악에 친근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18일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수석 객원지휘자 윌슨 응 지휘로 롯데콘서트홀에서 펼친 ‘클래식 인 무비’ 콘서트는 바그너에서 차이콥스키, 뒤카, 마스카니에 이르는 후기낭만주의 작곡가들과 ‘심포닉 재즈’로 미국 대중음악과 오케스트라의 연결고리를 마련한 거슈윈, 현대 영화음악가 모리코네의 음악까지 두루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연주된 작품 모두가 영화에 사용되었거나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사적 관현악곡이다.
첫 곡인 거슈윈의 ‘걸 크레이지’ 서곡부터 이날 연주의 특징은 비교적 명확히 잡혀 나갔다. 각 파트가 서로 귀 기울여 듣는 단정한 앙상블이 확고한 인상을 주었다. 현악이 리드하는 전체적인 밸런스는 따뜻하고 풍성한 음의 색상으로 다가왔다. 트럼펫과 타악기가 증강된 2관 편성이었지만 이보다 큰 편성의 느낌이었다. 왼쪽에 함께 자리 잡은 바이올린군(群), 하프, 피아노가 절묘한 밸런스로 아름다운 음색의 조합을 자아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어지는 모리코네 ‘미션’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오보에의 나무랄 데 없는 솔로도 좋았지만 현의 따뜻한 음색이 멋진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거슈윈 ‘파리의 미국인’에서 트럼펫 솔로는 등장하면서부터 도회의 석양과 같은 희부연 느낌을 잘 살려냈다. 후반부 알레그로로 벨(나팔)을 연 트럼펫과 약음기를 낀 트럼펫이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부분에서 고음역에 미세한 어긋남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이 곡이 요구하는 트럼펫의 까다로운 악구들을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은 넉넉하게 구현했다.
전체적으로 이 콘서트에서 윌슨 응의 리드는 말끔하게 꾸려내 묶은 선물 상자를 연상시켰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불길을 확 지펴 올리지만 악보가 요구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열기의 절정에서 템포를 잡아 늘이거나 악보 지시 이상의 강약 대비로 도취를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정석적인 윌슨 응의 곡 해석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부분은 뒤카스의 ‘마법사의 제자’였다. 흥미롭고 유쾌하면서도 동시에 산만한 느낌이 있는 이 곡에서는 적절한 과잉이나 ‘폭주’가 실려도 좋을 듯했다. 정석적인 억양과 템포는 곡 자체의 산만함을 눌러주기에 최선의 설계가 아니었다. 트럼펫 파트가 ‘물 긷는 주제’를 약음기로 재현하는 부분에서는 미세하게 뒤처지는 모습이 귀에 들어왔다.
관악군이 최선을 다한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을 지나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의 명상적인 선율이 달아오른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악보에는 오르간이 함께 연주하도록 되어 있지만 콘서트 무대에서는 흔히 오르간 없이도 연주한다. 파이프오르간이 마련된 롯데콘서트홀이니만큼 오르간이 가세했다면 어땠을까. 부활절의 성(聖)과 치정 살인극의 속(俗)이 선명히 대비되는 오페라의 장면이 눈에 잡힐 듯 살아났을 것이다. 현의 따뜻한 색감이 아쉬움을 상당 부분 보상해 주었다.
차이콥스키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는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같은 더 열렬하고 더 인기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왜 이 곡이었을까. 궁금증은 곡이 시작되는 순간 풀렸다. 윌슨 응은 이 곡에 대한 분명한 설계를 갖고 있었으며 아마도 개인적으로 이 곡을 좋아할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여러 음색이 경쟁하는 목관부 전체가 화음의 색깔을 결정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부분들에서 윌슨 응의 음량 배분은 완벽했다. 윌슨 응과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햄릿 서곡’, 나아가 ‘만프레드 교향곡’도 듣고 싶어졌다.
백수련 악장의 솔로가 활약한 모리코네 ‘시네마 천국’ 중 ‘사랑의 주제’로 전체 프로그램을 마친 뒤 윌슨 응과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은 앙코르로 바흐 토카타와 푸가 D단조의 스토콥스키 편곡 버전을 내놓았다. 스토콥스키가 돌아와 구름 위 신들의 세계를 재현한 듯한, 아쉬움 없는 마무리였다.
유윤종 음악평론가·클래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