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미국 등 해외에만 등록된 특허를 국내에서 사용할 때도 과세할 수 있다고 판결하며 33년간 유지된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이로써 국세청은 해외 특허를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장기적으로 수십조원의 세수를 확보하게 될 전망이다. ◇“특허 속지주의 한계” 새로운 해석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8일 SK하이닉스가 이천세무서를 상대로 낸 경정거부처분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국내 미등록 특허권에 관한 사용료라도 그 특허 기술을 국내에서 제조·판매 등에 사실상 사용하는 데 대한 대가라면 국내원천소득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이번 판결은 1992년 첫 과세당국 패소 이후 33년간 유지돼온 대법원 판례를 전면 뒤집은 것이다. 기존 판례는 특허권이 등록된 국가에서만 유효하다는 ‘특허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국내에 등록되지 않은 해외 특허에는 과세할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 전합은 “특허권 속지주의는 특허기술의 국내 사용이 국외 특허권자에 대한 특허침해 행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며 “특허기술을 국내에서 사용할 수 없다거나 사용 대가를 지급하는 것을 상정할 수 없다는 논리가 도출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특허기술의 사용은 특허가 등록된 국가가 어디인지와 관계없이 어디서든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소송의 발단은 SK하이닉스가 2013년 미국 A사와 맺은 특허 라이선스 계약이다. 미국에서 특허침해 소송을 당한 SK하이닉스는 미국에만 등록된 반도체 특허 40여 건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5년간 매년 160만달러(약 22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SK하이닉스는 계약에 따라 특허 사용료를 지급하면서 약 3억1000만원의 원천징수분 법인세를 국세청에 납부했다. 하지만 이후 “국내 미등록 특허권에 대한 사용료는 과세 대상이 아니다”며 법인세 환급을 요구했고, 국세청이 이를 거부해 법정 다툼이 시작됐다.
1심과 2심은 모두 SK하이닉스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 전합은 대법관 10인의 다수 의견으로 이를 뒤집었다. 노태악·이흥구·이숙연 대법관 3인은 “특허권의 속지주의 원칙상 특허의 사용은 해당 특허권이 등록된 국가 내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고 반대 의견을 냈다. ◇글로벌 IT 기업 직격탄 예상이번 판결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해외 특허를 광범위하게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스마트폰과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수많은 해외 특허 기술을 활용하는 국내 기업의 부담도 늘어날 수 있다.
최용환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미등록 특허사용료에 대한 원천징수 의무가 있다고 본 판결”이라며 “미국 특허 기업의 원천징수분까지 부담하기로 약정한 기업의 경우 악영향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현재 관련 법리로 진행되고 있는 기업들의 불복 관련 세액만 4조원이 넘는다”며 “한국 기업들의 특허 사용료 지급은 앞으로도 계속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수십조원의 세수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IT 시장이 커지면서 국내 기업의 반도체·스마트폰 관련 특허료 지급액도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그동안 논란이 된 한·미 조세협약의 ‘특허 사용’이라는 용어 해석에 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대법원은 조약에 정의되지 않은 용어는 국내법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해 새로운 판례를 내놨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