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커버 스토리 - 거버넌스 빅뱅 ① 총론
최근 한국 기업 지배구조는 상법개정 같은 법률 차원의 하드 룰(hard rule)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주주의 충실 의무를 주주에게로 확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3%룰 강화, 전자주주총회 의무화, 집중투표제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 국내 기업지배구조가 안고 있던 고질적 문제, 즉 지배주주의 과도한 영향력, 소액주주의 권리 제약, 불투명한 경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다.
실제로 상법개정 등 법적 제도 변화는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고, 시장의 신뢰를 높이며, 해외 투자자로부터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완화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하드 룰 중심 접근은 몇 가지 부작용도 낳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제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 소송 리스크가 증가하며, 경영 판단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예컨대,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는 주주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소송 가능성을 높이고 경영진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데 제약을 줄 수 있다. 또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동시에 외국계 행동주의 자본의 경영권 영향력 확대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제도 개혁의 명분과 실질 운영 사이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한국, 상법개정 추진...해외 거버넌스 개선 동향은
한국의 상법개정안은 주요 현안을 정부가 법안 개정 형태로 강제성을 띤 조치라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또 일반적으로 상법개정을 위한 ‘상법특별위원회’를 만들지 않고 의원 입법으로 통과되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로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력은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시대적 흐름이다. 나라별로 강제와 자율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유의할 만하다.
예를 들어 독일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단순히 시장 자율에 맡기지 않고 법률을 통해 큰 틀을 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2022년 코로나19 시기 가상 주주총회를 정식 법률로 도입한 사례나 여러 번의 입법을 통해 도입한 노동자 이사제를 법률로 보장하는 공동결정제도(Co-determination)가 대표적이다. 독일은 법이 최소한의 강제 규범을 제시하면, 그 위에서 독일 거버넌스 코드(DCGK)가 모범 기준을 제공한다. 코드는 ‘준수 혹은 설명’ 원칙에 따라 기업이 권고 사항을 준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거버넌스 코드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영국은 기관을 통한 압력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기관투자가와 기업들이 코드에 따라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도록 유도하면서 독일과 같이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 사유를 설명하도록 해 시장의 감시와 압력을 통해 거버넌스 개선을 이룬다. 영국은 내년부터 시행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개정하면서 기업에 형식적 보고가 아닌, 활동과 결과에 관한 보고를 하도록 해 실질적 행동 개선을 요구했다.
일본의 움직임은 정부 주도 혼합형이다. 일본은 금융청과 도쿄증권거래소가 협력해 투자자와 기업 간 건설적 대화를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스튜어드십 코드와 거버넌스 코드를 모두 운영하면서 최근 개정을 통해 기업의 자본 효율성과 공시 투명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도쿄증권거래소는 거버넌스 코드를 사실상 강제하면서 프라임 시장에 상장된 기업에 영어 공시를 요구하고, 해외 투자자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대만도 금융감독위원회가 주도한 ‘기업지배구조 3.0 로드맵’과 스튜어드십 원칙을 통해 ESG 공시와 기관투자가의 책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2024년부터 자본금이 대만 뉴달러 100억 이상(약 4600억 원) 상장회사 및 금융·보험업 상장회사는 이사회에서 독립이사가 최소 3분의 1 이상이어야 하고, 독립이사의 연임을 3기 초과하지 않도록 제한했다. 특히 대부분 상장사가 주주총회에서 e-voting을 활용하도록 유도했다. 이와 함께 주주총회 개최일자 분산을 통해 참석자 부담을 완화하고, 주주총회 관련 공정성을 개선했다. 또 자본금 대만 뉴달러 20억(약 920억 원) 이상 기업에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의무화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향과 과제는
최근 국내에서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3%룰 적용과 집중투표제로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 이왕겸 미래에셋증권 책임투자센터장은 “최근에는 이사의 충실의무보다 감사위원과 집중투표제로 기업의 관심이 집중되는 추세”라고 짚었다. 예컨대 감사위원 제도 대신 감사역 제도와 감사 감시위원회 설치회사 제도 중 선택할 수 있는 일본에 비해 한국의 조치가 더욱 강제력이 있다. 한국 기업에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3%룰이 도입되면 기업은 감사위원 후보 검증과 선임 준비에 시간 및 비용 부담이 커진다.
더 큰 관심은 집중투표제다. 집중투표제 의무 사항은 독일이나 대만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에서는 집중투표제와 유사한 소수주주 권리 제도가 있으나 실무적으로는 활발히 사용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집중투표제는 대주주 입장에서 경영권 방어가 취약해지고, 소수주주가 연합해 경영진을 교체하거나 이사회 운영을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정부는 앞으로 더욱 적극적인 법 개정을 예고했다.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상장사 인수합병 시 일반 주주에게도 경영권 프리미엄 가격을 보장해주는 의무공개매수 등 관련 조치가 거론되고 있다. 또 자사주 소각 및 보유 공시 기준 강화, 발행주식 총수 대비 자사주 비율 공개 확대 등이 정부 국정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상법개정안에 따라 법무부는 기업이 참고할 수 있도록 경영진 행동 기준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이다. 기업들은 방어 수단 약화 우려가 크므로 입법 시 방어 메커니즘이나 예외 조항이 포함되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 같은 정책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빠르게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기업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변화 속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우영 한국ESG연구소 박사는 “한국은 법률 개정 중심의 상향식(top-down) 개혁에 집중되어 있다. 제도의 강제력과 실행력은 높지만 기업 입장에서 부담이 크고, 변화의 속도가 빠른 만큼 실제 운영에서 혼란이나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장치가 실질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기업의 적응 속도를 고려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제도 변화는 단기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기업의 장기적 안정성과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단계적 시행, 시범 적용, 충분한 유예기간 등의 장치를 마련해 기업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예를 들어 전자주주총회 의무화에 따른 보안·IT 인프라 구축 비용, 감사위원 선출 방식 변경에 따른 법률 자문 비용 등은 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비용을 분담하거나 지원하는 정책,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차등적 적용 방안 등이 필요하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으로서는 눈앞에 안개가 끼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부담”이라며 “이번 일련의 조치로 기업의 부담은 현저히 늘어났다고 볼 수 있고, 정책적 지원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만 시행되고 나머지 안은 시행되지 않았기에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하지만, 현 상법개정만으로도 기업의 이사에 대한 소송 및 손해배상 청구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기업들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며 “현재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법무부 가이드라인이 조속히 나와야 기업의 의사결정을 빠르게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상법개정 같은 강제 규제는 단순히 준수해야 할 의무로만 볼 것이 아니라,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여 투자자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도 있다.
공시 질을 높이고, 이사회 독립성과 다양성을 강화하며, 주주와의 소통을 전략적으로 전개할 경우 이는 곧 자본시장에서의 신뢰 확대로 이어진다. 신뢰는 곧 낮은 자본조달 비용, 더 나은 평가, 그리고 기업가치 상승으로 귀결된다. 규제를 기업 성장의 촉매제로 활용하는 태도 전환이 중요한 시점이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차 상법개정안의 의의는 한국 기업의 고질적 문제인 소수주주의 보호”라며 “지금까지는 지배주주가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가면서 주가는 하락시키는 구조였다. 사실 주가는 소액주주 주식의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소액주주들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면 앞으로 기업의 주가가 올라갈 가능성은 더 커진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2차 상법개정안의 경우 글로벌 스탠더드보다 급진적인 측면도 있지만, 정부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의지로 볼 수 있다”라며 “앞으로는 기업의 의사 결정에서 주주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어야 하는지 기업문화 차원에서 정착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테파니 린 아시아기업지배구조 리서치 헤드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법적 개선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라며 “법이 틀을 마련하고, 코드가 모범 기준을 제공하며, 시장이 압력과 인센티브를 동시에 제공하는 구조가 이상적이다”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일부 기업은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대형 상장사 중에는 자체 분석을 통해 공시 품질을 끌어올리고, 외국인 투자자를 겨냥해 영문 IR 자료를 확대 제공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사회에 여성·외국인 전문가를 적극 영입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구현화 한경ESG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