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안전핀 사라진다”…‘자사주 의무 소각’ 속도전에 경영권 방어 우려

입력 2025-09-22 08:12
수정 2025-09-22 08:16
[커버스토리]




정부와 여당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소액주주 보호, 지배구조 개선, 시장 투명성 강화가 명분이다. 실제로 자사주 소각은 주당순이익(EPS)과 주당순자산(BPS)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어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자사주는 단순한 주가 부양 수단을 넘어 경영권 방어의 ‘최후 보루’로 기능해 왔다. 자사주 자체는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우호 세력에게 매각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나며 총수 측 지분율 방어에 활용된다.

2003년 영국 헤지펀드 소버린이 SK를 공격했을 때 SK는 보유 자사주 10.41% 중 약 4.6%를 하나은행과 신한은행 등 우호 세력에 넘겨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법원도 자사주 매각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때는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합병 반대에 나섰다. 삼성물산은 보유 자사주 5.76%를 백기사인 KCC에 매각해 찬성표를 확보했고 법원은 이 매각 역시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후 기업들은 자사주를 대거 매입했다.





자사주 매각은 외부 공격에 대응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기능해 왔으나 자사주 소각이 법적으로 강제되면 이러한 전략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자사주를 매입한 즉시 소각해야 하므로 백기사에게 매각해 경영권을 지킬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소액주주와 재계의 입장 차이가 첨예해진다. 일반주주들은 소각을 통한 주가 상승을 기대하고 있는 반면, 재계는 기업 경영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최근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도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지난 2023년 한 해에만 66개 국내 기업이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됐다. 이는 2020년 대비 6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오히려 기업 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대표적인 5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첫째, 자사주 매입 유인이 줄어 주가 부양 효과가 약화한다.

둘째, 미국·영국·일본 등 주요국은 자사주 보유·처분을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실제 보유 비중도 한국보다 높다. 셋째, 석유화학 등 산업 구조조정에 자사주가 활용되는데 소각 의무화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넷째, 합병 등으로 취득한 자사주 소각 시 자본금 감소로 사업 제약과 신주 발행 부담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기존 상법 개정으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약화한 상황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사실상 방어 수단을 박탈하는 조치라는 우려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에서도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재계는 자기주식 소각을 법으로 의무화한 국가는 드물다고 주장한다. 영국, 일본, 미국 일부 주(델라웨어, 뉴욕)는 자사주를 자유롭게 보유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독일만 자본금 10% 초과분에 대해 3년 내 처분 의무를 부과하며 처분하지 못하면 소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각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대부분의 국가가 자사주 활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상당수 주에서 자사주를 매입하면 유통주에서 빼버리는 것도 ‘매입=소각’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재계의 우려는 자사주 소각만이 아니라 경영권을 위협할 만한 입법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커지고 있다. 2011년 상법 개정으로 자기주식 보유와 활용이 허용됐으나 최근 3%룰, 집중투표제 등에 소각 의무화까지 더해져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9월 8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과 간담회를 갖고 자사주 소각과 관련한 기업의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다. 자사주 활용 제한 이전에 경영권 방어 수단의 제도적 보완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식 ‘포이즌 필’(기존 주주에게 할인된 신주 매수 기회 제공), 차등의결권, 황금주 제도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재계 관계자는 “일률적 소각 의무화는 정상적 경영권 방어와 재무 전략을 무력화시키고 기업 투자 의욕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영권 방어 수단을 빼앗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보호장치부터 마련해줘야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