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해 거센 사퇴 압박을 가하는 가운데, '익명의 제보자'에서 시작된 의혹이 17일 정치권을 흔들었다. 부승찬 민주당 의원이 대정부질문에서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했고, 그의 발언은 목소리가 큰 민주당 '스피커'를 타고 국회와 사법부를 흔들었다.
부 의원은 전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헌재에서 대통령 파면 결정이 이루어지고 3일 후인 4월 7일경에 한덕수, 정상명(전 검찰총장), 김충식(김건희 여사 모친 측근), 그리고 조희대 대법원장이 만났다는 제보가 있었다"며 "당시 조 대법원장이 '이재명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대법원에서 알아서 처리한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여권은 부 의원의 발언을 공격적으로 퍼뜨렸다. 우선 그 자리에 있던 김민석 국무총리가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사실이라면 국민적으로 굉장히 충격이 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에 상처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진위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이 낫겠다"고 화답했다.
이어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이날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의혹 제기가 사실이라면 국민 여러분,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며 "조 대법원장은 어떻게 하시겠느냐"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아예 "대선 후보를 제거하려 한 조희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특검이 필요하다"며 조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이미 마련했다고 거들었다. 그는 "그 전이라도 공수처가 고발된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법원이 내란에 협조했는지 여부를 밝힐 결정적 증거가 이 판결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서상범 조국혁신당 법률위원장도 민주당이 공개한 '익명의 제보'를 사실로 가정하며 "파기환송 사건 자체가 불공정했고 여러 정치적 개입이 있었다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부 의원이 제기한 의혹은 이미 지난 5월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조희대 대법원장 등 사법부의 대선 개입 의혹 진상 규명 청문회'에서 제기했던 건이다. 서 의원도 당시 "제보를 받았다"며" 녹취록을 공개했었다.
이후 이 제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나 제보자의 실명, 정황 증거가 제시되지 못했지만, 부 의원이 대정부질문을 계기로 익명 제보를 재소환한 것이다.
이에 야권에서는 '배상' 판결이 난 '청담동 술자리 의혹'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청담동 술자리 의혹은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법무부 장관 시절인 지난 2022년 7월경 윤석열 전 대통령, 김앤장 변호사 30여 명과 함께 청담동 고급 술집에서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졌다는 내용이다.
이 의혹은 일파만파로 퍼졌지만, 최초 제보자의 여자친구이자 당시 술자리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던 A씨는 같은 해 11월 경찰에 출석해 이 의혹이 허위라고 말했다. 의혹을 제기했던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당시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은 결국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8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청담동 술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허위"라며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청담동 술자리 의혹은 '익명 제보 → 여론 몰이 → 사실무근 확인 → 책임 실종'의 악순환이 정치의 신뢰를 갉아먹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이 사건 이후 "청담동 술자리 2탄이냐"는 말이 마치 관용어구처럼 정치권에서 회자하는 이유다.
전주혜 전 국민의힘 의원도 이날 YTN 뉴스에 출연해 녹취록 의혹 공세에 대해 "전형적인 공작정치라고 생각한다"며 "(조희대 의혹을) 듣고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했던 김의겸 의원의 법사위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은 야당이었던 민주당 의원들조차 칭찬했을 정도로 정말 청렴결백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서 재판하는 분이다. (한덕수 전 총리를) 만났다는 것 자체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며 "결국 결정적인 이유는 이재명 대통령의 파기환송심 아니겠나? 특정인에 대한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판사한테 그만두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조희대 대법원장과 한덕수 전 총리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오후 입장문을 통해 "(이재명 대통령 사건과 관련해) 한 전 총리와는 물론이고 누구와도 논의한 바가 없다"며 "거론된 나머지 사람들과도 제기되고 있는 의혹과 같은 대화 또는 만남을 가진 적이 없음을 명백히 밝힌다"고 했다.
한 전 총리도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한 전 총리 측은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탄핵 결정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조 원장과 회의나 식사를 한 사실이 일체 없다"며 "한 전 총리는 조 대법원장과 개인적 친분도 전혀 없다"고 했다.
이번 사안이 '청담동 술자리 2탄'으로 기억될지, 실체 규명으로 귀결될지는 민주당이 말하는 '결정적 증거'가 실제로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익명의 제보'에 기대 파장이 엄청난 의혹을 별다른 검증 없이 제기하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개혁신당 정이한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최고사법기관의 수장을 겨냥한 이런 발언이 오직 확인되지 않은 제보에 기댄 것이라면, 이는 명백한 정치공작이자 국민 신뢰를 짓밟는 행위"라며 "사실이 아니면 누가 책임을 지나? 민주당은 매번 '아니면 말고' 식 의혹을 던지고,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가는 뻔뻔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