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얼리 "윤이상·진은숙…거장들 음악 연주할 때 한국인의 피 흐른다고 느껴"

입력 2025-09-11 16:11
수정 2025-09-12 01:38
지난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선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 화제가 됐다. LA필하모닉이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연 ‘서울 페스티벌’에서 TIMF앙상블이 작곡가 진은숙의 곡 ‘구갈론’을 연주해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낸 것이다. 현지 매체인 LA타임스도 “언어를 초월한 환희의 소리”라고 극찬했다.

이 감동의 순간을 한국에서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TIMF앙상블은 오는 1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윤이상 타계 30주년 기념: 이상을 바라보다’를 선보인다.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해 신동훈, 진은숙 등의 작품을 연주한다. TIMF앙상블은 현대음악 연주에 정통한 악단이다. 2001년 통영국제음악제(TIMF)를 홍보하는 취지에서 창단됐다. 이번 공연의 지휘는 미국 앤아버심포니오케스트(A2SO) 음악감독인 얼 리(사진)가 맡는다. 그는 아르떼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에 뿌리를 둔 세 세대의 작곡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공연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얼 리는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계 지휘자를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다. 2024-2025시즌까지 보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BSO) 부지휘자로 활약한 그는 2022년부터 A2SO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6월 뉴욕필하모닉이 내한했을 때도 부지휘자 역할을 맡았다. 전남 여수 태생인 그는 11세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한국이름은 이얼.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첼리스트로 석사와 최고 연주자 과정까지 마쳤지만 근육 이상으로 왼손에 문제가 생기자 지휘자로 진로를 바꿨다.

미국에서 음악을 배웠지만 한국인 작곡가의 작품은 얼 리에게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가 처음 접한 20세기 클래식 음악이 이번 공연에서 선보일 윤이상의 곡 ‘거리’였다. 그는 “1990년대 초 아버지가 윤이상 선생님의 작품 모음집 CD를 사 오셨다”며 “그때 ‘거리’를 듣고 조성 너머에 이런 음악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얼 리는 진은숙의 ‘퍼즐과 게임 모음곡’을 통해 TIMF앙상블의 연주를 처음으로 접하기도 했다. 그가 이 악단과 함께하는 이번 공연 기회를 소중하게 느끼는 배경이다.

얼 리가 기억하는 진은숙은 “살아 있는 전설”이면서도 자상했다. 그는 2022년 BSO가 뉴욕에서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을 미국 초연으로 선보일 때 이 거장을 처음 만났다. “굉장히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셨어요. 제가 공부하던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의 작품 악보를 들고 가 질문했는데, 친절하게 악보를 꼼꼼히 봐주시고 조언까지 해주셨죠. ‘구갈론’에선 거장의 독창성을 느낄 수 있어요. 선생님은 단순히 기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색채와 성격을 표현하려고 주법을 다양하게 확장하죠.”

얼 리는 이번 공연에서 동갑내기 작곡가인 신동훈의 곡 ‘사냥꾼의 장례식’도 선보인다. 신동훈은 윤이상과 진은숙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음악 계보를 잇는 인물이다. 베를린필하모닉과 LA필하모닉 등에서 작곡을 위촉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얼 리는 “한국적 배경을 가진 작품을 연주할 때면 한국인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며 “젊은 한국인 작곡가들을 꾸준히 응원하고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바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는 “가족이 먼저”라고 말하는 ‘딸 바라기’다. 딸도 피아노를 배우면서 아빠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전 손을 다치면서 첼로를 놓아본 적이 있잖아요. 그땐 음악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어요. 그래서인지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