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부활 vs 근로자 이민 단속’…미국의 해법은?

입력 2025-09-13 11:37
수정 2025-09-13 11:38


미국 국토안보부가 9월 4일(현지 시간) 조지아주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불법체류자 단속과 관련해 475명을 체포하면서 이민 당국의 체포 배경을 둘러싼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 중 300여 명이 한국 근로자로 밝혀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제조업 부흥과 미국에 대규모 투자한 기업의 직원까지도 이민 단속 대상에 넣은 이민 당국의 모습이 상충해서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끝나지 않은 한·미 관세 협상에서 미국 정부의 한국 정부 압박용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일각에선 내년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보수층 결집을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다. 미국 투자한 韓 기업에 이민 단속
국토안보수사국(HSI) 소속 스티븐 슈랑크 조지아·앨라배마주 담당 특별수사관은 5일 브리핑에서 “어제 국토안보수사국은 법 집행기관들과 협력해 불법 고용 관행 및 중대한 연방 범죄 혐의와 관련해 진행 중인 형사 수사의 일환으로 법원의 수색영장을 집행했다”고 말했다.

해당 공장은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으로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할 예정이며 인근의 76억 달러 규모 전기차 생산 부지는 조지아주 역사상 최대 제조 프로젝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급습이 미국의 긴밀한 동맹이자 주요 교역 상대인 한국을 흔들었다”고 표현했다. 현대차는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내에 260억 달러의 신규 투자를 약속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간) 이에 대해 “내 생각에는 그들은 불법 체류자(illegal aliens)였고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라며 이민단속국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 단속과 제조업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가 충돌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우리는 다른 나라와 잘 지내기를 원하고 훌륭하고 안정적인 노동력을 원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일하는 불법 체류자들이 많이 있었다”며 “그들(이민 당국)은 그들의 일을 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관세 협상 압박용? 중간선거 전략?
미국 현지에선 한국 기업에 대한 이민 단속이 한·미 관세 협상과 연결 지어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한국과 미국이 관세율을 15% 수준으로 낮추기로 했지만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의 구체화 방안을 두고 미국 측과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이번 단속이 한·미 관세 협상을 더욱 복잡한 상황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 국내 정치 이슈인 ‘불법 체류자’ 문제와 경제 이슈인 해외 기업 투자 이슈가 겹치면서다. 트럼프 행정부로선 불법 체류자 단속에서 물러서는 이미지를 보이는 순간 공화당 지지층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미국 정치권이 내년 중간선거와 관련한 정지작업에 최근 들어가면서 이번 이민 단속도 선거 전략의 일환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동석 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이미 미국 의회는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며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으로선 불법 이민자 단속이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슈이기 때문에 더욱 이 사안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다.

미국 대통령 임기 중간 시점에 열리는 선거로 연방 하원의원 전체(435석)와 연방 상원의원 100석 중 3분의 1, 주지사·주의회·지방정부 선거 등이 치러진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조직에서 적용하는 특유의 경쟁 구도가 행정부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점을 이유로 보고 있다. 제조업 부흥을 외치는 상무부와 이민세관단속국(ICE)도 비슷한 관계라는 설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리얼리티 프로그램 ‘어프렌티스’에서 보여준 경쟁과 충성 경쟁 중심의 분위기를 행정부 운영에도 투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인사와 정책 결정 과정이 일종의 ‘탈락 게임’처럼 전개되며 각 부처 장관과 참모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며 충성을 겨루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을 주도하는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지난 5월 ICE 회의에 참석해 하루에 3000명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트럼프 2기 첫 100일 동안 하루 평균 체포자 수(665명)와 비교하면 4배가 넘는 규모다. 美 노동력 부족 문제 심화시켜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단속이 미국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더 심화시킨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6일(현지 시간) 블룸버그는 ‘대규모 추방이 노동력의 위기를 만든다’는 제목으로 “미국 노동시장은 지금 120만 명의 노동자가 부족하다”며 “이는 이 나라에서 이민자를 몰아내기 위해 벌어진 가장 가혹하고도 공격적인 캠페인의 결과다”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불법이거나 부적격한 이민자를 몰아내면 황금기가 올 것이라고 약속지만 현실은 그 반대라고 설명한다. 이민자 노동은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고령화하는 국가의 인력 부족을 메운다고 덧붙였다.

실제 최근 고용지표에선 이민자들의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제조업, 운송업 등에서 고용이 악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노동통계국(BLS)이 5일(현지 시간) 발표한 고용보고서에 따르면 8월 비농업 부문 일자리는 전월 대비 2만2000개 증가했다. 실업률은 4.3%로 202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우존스가 집계한 시장 예상치는 7만5000개 증가와 4.3%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건설업협회(AGC)는 8월 인력난이 이제 프로젝트 지연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업체의 92%가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설문 응답자 중 28%는 이민 단속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이민자는 미국 노동력의 약 20%를 차지한다. 농업·어업·임업 종사자의 약 45%, 건설노동자의 30%, 서비스업 노동자의 24%가 이민자다. 보건산업에서는 가정간호 도우미의 거의 3분의 1, 요양시설 노동자의 5분의 1 이상이 이민자다. 비자 확대 필요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인 300여 명 구금 사태를 계기로 미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출입국 및 비자 정책을 개선할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더욱 엄격해진 비자 제한 정책 탓에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전문·기술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이번에 구금된 사람들의 경우 전자여행허가 이스타(ESTA)와 단기 상용비자인 B1·B2 비자 등으로 미국을 오간 게 문제가 됐다. 원칙대로라면 미국에 투자한 기업이 현지에 직원 파견을 위해 신청하는 E2(투자)나 주재원(L1) 등 정식 취업 비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구금된 300여 명 대다수는 LG에너지솔루션이 아닌 하청 기업에 소속된 만큼 이런 식의 비자를 받기 힘들다.

하지만 미국 측도 비자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첨단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내 숙련 근로자 부족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게다가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 입장에선 공장을 짓고 생산을 가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숙련된 한국인 근로자를 데려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미국 상무부는 국토안보부에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해 특정 분야의 전문·기술 인력에 예외를 인정하는 비자(E-2 또는 E-3 비자) 발급이나 전문 직종 외국인을 위한 H-1B 비자의 국가별 쿼터(할당량)를 늘려야 한다는 등의 요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미 투자 한국 기업들이 지속해 요구해 온 바이기도 하다.


뉴욕=박신영 한국경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