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에서 마주치는 절반이 한국인" CES 위상 낮아지나

입력 2025-09-10 14:07
수정 2025-09-10 14:08

매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는 미래 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혁신의 장’으로 불려왔다. 국내 대기업은 물론 글로벌 빅테크들이 참가해 기술 로드맵을 발표하고 신제품을 공개했다. 단순한 전시회를 넘어 인간과 기술의 미래를 가늠하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한국 기업은 2010년대 초반부터 CES의 주인공이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주축이었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 회장이 2010년 처음 CES를 찾으며 상징성을 더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모빌리티 기업들의 참여가 확대되며 CES는 ‘라스베이거스 모터쇼’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심장으로 불렸던 디트로이트 모터쇼가 직격탄을 맞을 정도로 CES의 위상은 높았다.

CES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존재감도 커졌다.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기관 등이 방문단을 꾸려 이 쇼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2020년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CES 관람객을 보낸 나라로 기록됐다. 코로나19 이후 처음 열린 CES 2022에서는 라스베이거스가 한국 기업으로 도배됐다. 코로나19 오미크론이 번지면서 미국 빅테크가 불참한 가운데,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한국 기업이 CES의 주연으로 올라섰다. 2022년 전체 전시 기업의 18%가 한국 기업이었다.

올해도 한국인들의 CES 사랑은 이어졌다. 올해 CES에는 한국에서는 역대 최대 규모인 1031개 사가 참여했다. 참여국 중 3번째로 많은 기업이 CES에 부스를 꾸렸다.올해는 4대 그룹 총수 중 최태원 회장만 참석
스타트업관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아도 소통이 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 절반이 한국인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기업의 존재감이 높았다. 올해 CES 스타트업에 참여한 1300여개 사 중 652개가 한국 스타트업이었다.

그러자 몇 년 전부터 대기업 내부에서는 CES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업계 관계자는 “구글이나 아마존 역시 자체 행사에서만 소프트웨어 관련 중요한 발표를 하고 CES에서는 미래 모빌리티 등 구색 맞추기용 전시만 하다 보니, 한국 기업에서도 비싼 비용을 내고 홍보 효과는 줄고 있는 전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지 번졌다”고 말했다.

한국 대기업들도 CES를 통해 선보이던 기술 홍보 전략을 바꾸고 있다. SK그룹은 내년 CES 2026에 불참한다. 대신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엔비디아와의 ‘밀착전시’에 집중한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가 매년 미국에서 개최하는 글로벌 AI 컨퍼런스인 ‘GTC(GPU Technology Conference)’에 참석한다는 계획이다. 2024년부터는 SK하이닉스가 대만 IT 박람회 ‘컴퓨텍스’에도 참가하며 엔비디아와의 스킨십을 늘려왔다.

삼성전자는 올해 CES 메인 전시관인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홀’ 대신 윈 호텔(Wynn and Encore Las Vegas)에 약 1400평 규모의 단독 전시관을 조성하기로 했다. 호텔에 단독 전시관을 여는 건 업계 최초 시도다.

특히 국내 기업 총수들의 불참은 CES를 바라보는 대기업 내부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CES에 모습을 드러낸 국내 4대 그룹 총수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유일했다. 범위를 20대 그룹 총수 일가로 넓혀도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과 구자은 LS그룹 회장 정도만 참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상무 시절이던 2007년 처음 CES를 찾은 뒤 7년 연속으로 현장을 지켰지만, 2013년 이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때 미국, 일본을 거쳐 한국 기업이 주도했던 CES는 이제 중국 기업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내년 기조연설자로는 중국 IT기업 레노버의 위안칭 양 회장이 확정됐다. 업계에서는 AI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 역시 CES의 위상 변화에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자 업계 관계자는 “올해 CES 혁신상 500개 중 30% 이상이 한국 기업의 제품이었다”며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하드웨어 중심의 CES 혁신상보다는 더 효율적으로 기술 혁신을 홍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