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경제부총리에 예산통을 기용한 것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 풀기가 진보 정부 특허나 다름없게 된 이후 기획재정부 장관은 예외 없이 예산을 짜던 관료에게 돌아갔다. 기재부에서 근무하는 내내 예산 말고는 안 해본 구윤철 부총리도 발탁되자마자 민주당 정권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팽창 예산부터 짰다.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8% 넘게 늘려(본예산 기준) 편성했는데, 이는 내년 성장률 전망치(1.8%)의 네 배가 넘는다. 가계로 따지면 월급 상승폭의 네 배 이상을 쓰겠다는 얘긴데, 이쯤 되면 살림을 내팽개치고 막 살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비정상적으로 막을 내린 지난 정부가 그나마 짧은 2년여간 세입 증가율보다 세출 증가율을 낮게 가져가 적자 재정을 피하려고 노력한 것은 벌써 과거 얘기가 됐다. 예산당국인 기재부는 그래놓고 이대로 가면 내년 말 국가채무비율이 50%(국내총생산 대비)를 넘고, 40년 뒤에는 150%대로 급증해 경제 규모의 1.5배가 된다는 걱정 어린 보고서를 냈다. 지금 당장은 쓰고 싶은 데 다 쓰면서 앞날 걱정을 하는 꼴인데, 국가 재정을 책임지는 기재부가 맞나 싶다.
민주당 정부가 재정 팽창에 대해 방어하는 논리는 한결같다. 경제가 어렵고(그러니 돈을 풀어야 하고), 재정 여력이 그나마 있다(다른 나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는 것이 이유다. ‘분자’인 채무가 늘어나도 재정이 마중물 역할을 하면 ‘분모’인 국내총생산(GDP)이 커져 결국 채무비율이 떨어진다는 이른바 ‘좋은 채무론’도 단골 논리다.
그건 그렇다 치자. 돈을 풀어야겠고 적자 국채 발행은 무한정할 수 없으니 들고나온 게 증세다. 지금 세계 각국은 자국 산업과 기업을 키우기 위해 치열한 세율 인하 경쟁을 벌이는 중인데, 민주당 정부는 정권을 되찾자마자 법인세부터 올렸다. 다른 세목보다 여론에 덜 민감한 게 법인세다. 올려도 반발이 덜하다는 얘기다.
이런 배경을 다 아는데도 부총리는 엉뚱하고 왜곡된 논리로 증세를 합리화하고 있다. “세금을 깎아주면 투자를 하고 선순환 구조로 갈 거라고 예상했는데 법인세는 오히려 40%나 빠지며 성장도 투자도 줄어든 상황이다”(지난달 17일 국회 인사청문회), “감세 정책을 펴면서 기업이 투자를 늘려 경기 대응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세수가 나빠져 지난 정부에서 100조원이 펑크 나는 악순환 프레임으로 갔다”(이달 2일 국무회의)는 발언이 그렇다. 하지만 부총리 스스로도 모르진 않겠지만 지난 정부의 세수 펑크는 감세 탓이라기보다 경기 불황으로 기업 실적이 급감한 데 따른 결과다. 세금 정책은 재정 투입보다 가계와 기업 등의 경제활동에 훨씬 민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런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역대 경제 수장이 증세에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때 첫 경제부총리로 낙점된 김동연도 정권 뜻에 따라 팽창 예산을 짜면서도 증세에는 반대 입장을 고수하다 당·청의 미움을 샀다.
구 부총리에게 이런 결기까지 기대는 안 한다. 그럼에도 일국의 경제부총리라고 하면 신념과 자기 고집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쉬운 것이다. 지난달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마치고 나서 자동차에 대한 미국 측의 25% 관세 협박을 15%로 낮춘 것을 놓고 “선방했다”고 자평한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관세 0%를 적용받다가 갑자기 15%를 물게 된 국내 자동차 기업은 뭔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경제에 관한 한 관료에게 전권을 부여한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대통령 리더십이 만기친람형으로 바뀐 뒤로는 기대난망이다. 그럼에도 경제부총리는 누가 뭐라 해도 “경제는 내가 책임진다”는 국가 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있어야 하는 자리다. 때로는 경제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정치에 맞서 일전도 불사해야 한다.
기재부는 조만간 예산 편성권을 잃게 되는 운명을 앞두고 있다. 예산권은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다른 부처를 움직이게 하는 칼자루나 다름없는데, 그 칼자루를 빼앗긴 기재부는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될 처지다. 이럴수록 경제부총리라도 ‘거트’(배짱)를 갖고 있어야 하는데, 부는 바람에 풀보다 먼저 누우면 우리 경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