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규제에 묶인 경제…'새로운 장벽'이 만든 뜻밖의 승자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5-09-10 07:00
수정 2025-09-10 07:18


전 세계적인 ‘비자 병목’ 현상이 글로벌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근로자 대규모 구금 사태가 대표적이다. 각국은 안보 등 다양한 이유로 비자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비자 발급 병목이 심해지면서 해당 업무를 대행하는 비자 아웃소싱 산업은 커지고 있다.보이지 않는 국경10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최근 미국 국무부는 코로나19 확산 시기에 한시적으로 완화했던 비자 인터뷰 면제 범위를 축소했다. 지난 9월 2일부터 대부분 비자 신청자에 대한 대면 인터뷰를 의무화했다. 학생(F/M), 취업(H/L/O) 등의 비자까지도 재발급 시 면제받기 어려워졌다. 미국 국무부는 "더욱 엄격한 심사와 검증으로의 회귀"와 "국가 안보 우려 우선"을 공식적인 이유로 들었다.

미국 국무부의 공개 대시보드에 따르면 주요 국가 주재 미국영사관의 방문비자 인터뷰 대기일은 일부 지역에서 수개월씩 길어진 상태다. 인도에서는 한때 관광·상용비자 인터뷰 대기가 999일까지 기록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급히 프랑크푸르트·방콕 등 제3국 원정 인터뷰를 허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유럽연합(EU)은 신규 출입국 규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다음 달 12일부터 EU는 역내 외국인 출입 관리 강화 시스템인 입출국관리시스템(EES)을 단계적으로 도입한다. EES는 모든 비EU 방문객의 지문과 안면 정보를 스캔해 출입국 기록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내년 4월 완전 가동을 목표로 하는 이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국경 관리의 효율성과 보안을 높이기 위해 설계됐다. 하지만 초기 시행 시 공항과 국경 검문소에서 물리적 혼잡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캐나다도 고질적인 비자 처리 지연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이민난민시민부(IRCC)에 따르면 올 7월 기준 전체 신청서 중 90만 건 이상이 서비스 표준 처리 기간을 초과한 '백로그(backlog)' 상태로 기록됐다. 취업 허가 신청의 46%가 백로그에 해당했다. 관련 기업은 인력 수급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영국 내무부비자이민국(UKVI)의 경우에는 '숙련 노동자 비자'의 공식 처리 기준은 3주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대 5주 이상 걸리는 경우가 빈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비자와 출입국 정책 변화는 단일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상호 영향을 미치며 전 세계적인 이동성을 옥죄는 '정책전염' 현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안보'를 명분으로 인적 교류의 문턱을 높이면, 다른 국가도 자국의 심사 기준이 느슨해 보일 것을 우려해 비슷한 제한 조치를 도입하려는 압력을 받게 된다. 결국 전 세계적인 비자 규제 강화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글로벌 경제의 혈맥을 막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무역과 혁신의 엔진을 멈추다글로벌 경제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단기적인 지출 감소에서부터 중장기적인 무역과 혁신의 동력 상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단기 경제 손실을 가늠하기 위해 간단한 시나리오를 적용해볼 수 있다. 세계 최대 출장협회(GBTA)는 올해 글로벌 비즈니스 출장 지출이 사상 최고치인 1조 57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올해 무역 분쟁과 정책 불확실성 등으로 예상 성장률을 종전 10.4%에서 6.6%로 하향 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자 병목’으로 출장 수요가 1~5%만 위축된다면 157억~785억 달러의 지출 손실이 발생한다. 이는 세계 총생산(약 113.8조 달러)의 0.01~0.07% 정도다. 여기에 거래 성사 지연, 신규 수출 계약 무산, 연구개발 교류 축소 등 간접 피해를 더하면 손실 폭은 훨씬 커질 수 있다.

비자 병목의 진짜 비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생한다. 글로벌 이동의 제한은 무역과 혁신이라는 경제 성장의 핵심 엔진을 타격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연구진의 '양자 간 무역 및 외국인 직접 투자에 대한 비자 제한의 부정적 영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따르면 양국 간 비자 요구가 양국의 무역량을 최대 25% 감소시키고, 해외 직접투자(FDI)도 약 25% 줄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경제학회(CEPII)의 ‘비즈니스 여행, 이민 제한으로 인해 저해되는 국제 무역의 동력’ 논문에 따르면 비자 면제가 포함된 무역 협정은 사업 출장 증가와 평균 11%의 무역 상승효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말하면 비자 장벽이 그만큼 교역을 옥죄고 있었다는 의미다.

미국 국립경제연구소(NBER)의 '비즈니스 여행, 이민 제한으로 인해 저해되는 국제 무역의 동력' 논문에 따르면 글로벌 비즈니스 출장이 10% 증가하면 특허 출원이 약 0.2%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면 교류가 지식 전파와 혁신 창출의 핵심 경로임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고급인력 비자를 제한할 경우에는 미국 다국적 기업이 국내에서 관련 고용을 늘리지 않은 경향이 있었다. 대신 해외 자회사 고용을 늘리거나 연구개발(R&D) 업무를 인건비가 더 저렴한 해외로 이전했다. 비자 제한은 국내 혁신 생태계에 오히려 역풍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화 예술계도 악영향을 받았다. 비자 발급 비용의 폭등과 처리 기간의 장기화는 국제적인 문화 교류를 마비시키고 있다. 미국 아티스트 비자 수수료가 460달러에서 1615달러로 250% 이상 급등했다. 비자 처리 기간은 일부 지역에서 8개월까지 늘어나면서 K팝 그룹 '카드(KARD)'와 캐나다 메탈 밴드 '리스파이어' 등이 올해 미국 투어를 전면 취소했다. 이는 아티스트 개인의 손실을 넘어 미국 공연 시장과 지역 경제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비자 장벽'이 낳은 거대 산업미국 등의 비자 시스템 비효율로 성장하는 산업도 있다. 각국 정부가 국경의 문턱을 높이는 동안 그 '문지기' 역할을 하는 민간 아웃소싱 기업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비자 신청 절차의 민영화로 VFS글로벌, BLS인터내셔널, TLS콘텐트등 소수의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과점 시장이 탄생했다. 이들은 정부의 행정적 비효율성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VFS 글로벌은 작년에만 2640만 건의 비자 신청을 처리했다. 작년에 누적 처리 3억 건을 돌파했다. 자빈 카카리아 VFS글로벌 최고경영자(CEO)는 “전 세계 69개국 정부가 우리를 신뢰한 덕분이며 우리는 기술·인력에 지속 투자해 서비스를 향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VFS는 올해 영국·호주·노르웨이·스웨덴·라트비아·아이슬란드·오스트리아 등 7개국 정부로부터 신규 비자센터 운영 계약을 따내며 사업을 확장했다.

BLS인터내셔널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경쟁사다. 인도 회사다. 최근 연 매출 219억 루피(약 3억 달러)로 전년 대비 30.8% 성장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TLS 콘텐츠는 최근 프랑스 정부 계약을 따내 미국 10개 도시와 자메이카에 11개의 비자센터를 한꺼번에 신설하는 등 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각국 정부는 사실상 자국의 '현관문'을 소수의 영리 기업에 위탁했다. 이런 '국경의 민영화'는 주권, 책임 소재, 데이터 보안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 기업은 막대한 양의 민감한 생체 정보와 개인 데이터를 수집한다. 하지만 예약 관리 알고리즘이나 보안 프로토콜은 베일에 싸여 있다. 서류 작성 지원, 택배 서비스 등 다양한 '부가 서비스' 등으로 신청자의 절박함을 이용해 추가 수익을 올리는 복잡한 요금 구조도 끊임없이 비판받고 있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은 근본적으로 '마찰 기반 서비스(Friction-as-a-Service)'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부의 비자 절차가 더 복잡하고, 비효율적이며, 느릴수록 이들 중개 기업의 가치는 높아진다. 예약 가능 시간이 희소할수록, 추가 비용을 내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서비스를 받으려는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한국의 딜레마한국엔 글로벌 비자 병목 현상이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미국 정부의 투자 유치 요구에 부응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하지만 해당 투자를 실행할 핵심 인력을 보내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최근 미국 조지아의 한국인 근로자 구금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최근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과학법' 등을 통해 동맹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했다.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재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해당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동맹국의 전문 인력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이민 정책을 고수하는 모순을 보였다.. 이런 미국의 정책적 엇박자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 해외 기업자들에게 예측 불가능한 '정치적 리스크'로 작용한다. 미국의 '프렌드쇼어링'이라는 전략의 근간을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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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