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로자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막무가내식 체포와 구금은 결국 미국 투자와 고용을 앗아가는 부메랑이 될 겁니다.”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조지아주 합작공장에서 벌어진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에 대해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진단했다. 당장 연말로 예정한 이 공장의 가동 시점은 주요 공정을 세팅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들이지 못하게 되면서 무기한 연기됐다. 8000여 명으로 계획한 현지 직원 채용도 늦춰진다. 그는 “주재원 비자(L-1·E-2) 등을 늘릴 수 있지만 서류 절차에만 3개월 이상 걸리고, 그나마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며 “핵심 장비를 다루는 협력업체 직원은 전자여행허가(ESTA)와 단기 상용(E-1) 비자가 막힌 탓에 미국으로 불러들일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국 투자
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 계획이 ‘시계 제로’에 빠졌다. 지난 주말 벌어진 대규모 구금 사태 이후 상당수 기업이 미국 공장의 인력 공급 문제는 물론 생산·투자 계획까지 다시 들여다보기로 해서다.
이런 흐름은 한국경제신문이 8일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는 14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긴급 설문조사에 그대로 드러났다. 구금 사태 여파로 미국 진출 계획에 변화가 생겼는지 묻는 질문에 57.1%가 사업 구조를 다시 짤 계획이라고 답했다. 14.3%는 공사 기간이 연장되거나 공장 정상화가 미뤄질 가능성에 대비해 프로젝트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산업계에선 반도체와 배터리, 변압기 업체가 상대적으로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인으로 대체하려고 해도 현지에 이 분야 전문가가 거의 없어서다. 주재원 비자나 전문직 취업(H-1B) 비자를 통해 본사 직원을 파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주재원 비자는 회사별 쿼터가 있고, 추첨으로 뽑는 H-1B에 당첨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여서다. 필수 인력 파견이 막히면 투자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기업들은 호소한다. ◇ 기업들, 출장 제도 원점에서 검토상당수 기업은 수십 년 동안 운영한 미국 출장 제도를 원점에서 다시 짜고 있다. 미국 출장 지침을 바꿀 계획을 묻는 질문에 64.3%가 ‘그렇다’고 답했다. 텍사스 테일러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는 최근 한 달 이상 이 지역에 출장 갈 때는 L-1 비자를 반드시 받도록 공지를 내렸다.
가장 시급한 정부 대책을 묻는 질문에 64.3%는 한국 전문인력 대상 별도 비자 쿼터(E-4) 신설을 요청했다. L-1과 H-1B 비자 확대를 요청한 기업은 각각 3곳, 2곳이다. 다만 이 같은 비자 정책 변화가 기자재를 납품하는 중소 협력사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본적으로 협력사들은 원청과 달리 미국 현지에 법인이 없어 H-1B는커녕 L-1 비자 발급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예외를 적용해 ESTA나 B-1 비자를 통한 출장이 가능하도록 정부가 협상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한·미 협력의 상징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가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화오션 등은 숙련공이 부족한 미국 현실을 감안해 한국 전문 인력을 필리조선소에 대거 파견할 계획이다. L-1 비자를 받아 미국에서 일할 수 있지만, 필요 인력이 늘어나면 회사에 부여된 쿼터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우섭/안시욱 기자
설문에 응한 美 진출 14개 기업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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