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김창열(1929~2021)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다. 반평생 도를 닦듯 줄기차게 물방울 그림을 그린 ‘물방울 작가’, 단색화의 대표 화가 중 한 명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큰 획을 그은 작가”(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 자신의 이름을 딴 국공립미술관(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을 둔 화가, 작품 한 점이 수억원에 거래될 정도로 상업적 성공까지 거머쥔 작가라서다. 김창열에 관한 지식은 대체로 이쯤에서 멈춘다. 그가 왜 물방울을 그리게 됐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속 시원하게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작가의 둘째 아들인 김오안 감독조차 김 화백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에서 “왜 아버지는 그토록 집요하게 물방울을 그렸을까”라고 독백할 정도다.
지난달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김창열 사후 첫 대규모 회고전은 그 물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이다. 설원지 학예연구사가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미공개 회화 21점을 포함해 총 120여 점에 달하는 김 화백 작품이 나왔다. 죽음과 전쟁에서 길어 올린 피와 땀을 영롱한 물방울로 바꾼 한 인간의 삶이 그 안에 있다. 전쟁과 소외의 상처를 딛고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1949년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중학교 동창 120명 중 절반, 그리고 여동생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끔찍한 참상이었다. “수많은 죽음과 끔찍한 잔인함을 봤다”고 그는 회고했다. 긁히고, 찢기고, 살갗에 총알을 맞아 뚫린 구멍에서 피와 체액이 흘러나오는 그 광경. 50여 년이 지난 2004년에도 일기장에 이렇게 쓸 만큼 상처는 깊었다.
“까마귀와 독수리가 시체를 뜯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김창열은 마음속 상처를 캔버스에 쏟아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 미술계에서는 앵포르멜(Informel·비정형 회화)이라는 추상화 형식이 유행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화풍으로, 물감을 비롯한 여러 재료를 캔버스에 거칠게 발라 정치·사회적 불안을 표현한 게 특징이다. 김창열의 고통을 표현하기에 제격인 화풍이었다. 이때 그린 앵포르멜 연작의 제목이 ‘제사’다.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의 넋을 기린다는 뜻이다. 전시 1부에서 만날 수 있다.
1965년 서른여섯 살의 김 화백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으로 갔다. 스승 김환기의 권유, 미국 록펠러재단의 지원 덕분이었다. 하지만 미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뉴욕에서 앵포르멜 회화의 유행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 기하학적 추상화를 시도했지만 미술계 반응은 싸늘했다. 재단의 추가 지원을 받는 데 실패한 탓에 김창열은 넥타이 공장 등에서 일하며 간신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노년의 김창열은 이 시기를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이때 겪은 고난은 김창열의 예술을 무르익게 하는 계기가 됐다.
뉴욕에서 본 각양각색의 현대미술은 그의 시야를 확 넓혔다. 덕분에 김 화백은 무엇을 그려야 ‘나만의 예술’을 할 수 있을지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았다. 1967년 그는 작품 뒷면에 ‘Flesh & Spirit’(살과 정신)이라고 썼다. 결국 자신의 출발점은 마음속 참혹한 전쟁의 기억이란 의미다. 기하학적 추상화를 그리려던 시도는 주제를 피, 땀, 눈물 같은 둥근 액체 모양으로 정리할 수 있게 했다. 넥타이 공장에서 일하며 배운 에어스프레이 기법과 스텐실 기법은 그의 새로운 무기였다.
“내면의 뜨거운 응어리들이 냉각돼 동그랗게 변하고 있었다”고 훗날의 김창열은 적었다. 전시 2부에는 그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뉴욕 생활 시기에 완성한 회화 21점과 드로잉 등을 볼 수 있다. 물방울을 그리다
1971년, 마침내 그의 캔버스에 첫 번째 물방울이 맺힌다. 프랑스로 건너가 활동을 이어간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가난했던 김창열은 파리 외곽의 마구간에 살며 작업했다. 재료값도 부족했다. 캔버스 뒷면을 물에 적셔 묵혀 뒀다가 물감을 떼낸 뒤 새롭게 그림을 그리는 ‘재활용’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리다가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봤다. 투명한 물방울이 기억 속 상처에서 새어 나오던 끈끈한 체액과 연결된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마음속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뿌듯한 느낌)에 온몸을 떨었다”고 김창열은 회고했다. 전시 3부 초입의 작품들이 그 결과물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73년 파리에서 연 개인전에 구름 관객이 모였다. 그중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있었다. “이건 정말 웅장하군.” 이런 평을 남겼다. 1976년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에서 연 전시에서는 모든 작품이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물방울은 김 화백의 마음속 상처를 씻어내는 정화수였다. 그의 철학은 1980년대부터 천자문을 배경으로 그린 물방울 연작 ‘회귀’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마지막 4부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제목의 회귀는 할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우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개인적 회귀이자, 수십 년간에 걸친 외국 생활 끝에 자신의 뿌리인 동양으로 돌아오는 문화적 회귀를 뜻한다.
이 연작에서 물방울은 일종의 렌즈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투명한 렌즈는 돋보기처럼 아래의 글자를 선명하게 확대하기도 하고, 빛을 굴절시켜 그 형태를 왜곡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을 다른 이에게 전가한다. 반면 누군가는 아픔을 동력으로 삼고 승화시켜 아름다움을 낳는다. 김창열은 후자였다. 그는 피와 눈물에서 영롱한 물방울을 길어 올렸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붓질로 꿰매고,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전시는 12월 2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