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사토시 나카모토일지도 모르는 [EDITOR's LETTER]

입력 2025-09-08 08:33
수정 2025-09-10 10:12



2008년 10월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으로 배포된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 백서가 사이퍼펑크 커뮤니티에 전해졌다. 저자는 기존 금융 시스템을 뿌리부터 흔드는 혁신을 제안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신뢰가 아니라 암호학적 증명에 기반한 전자 결제 시스템”이라는 선언은 당돌했고, 사이퍼펑크 대부분은 익숙한 황당한 주장쯤으로 무시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귀를 기울였다. 바로 할 피니였다. 그는 이미 비트코인의 핵심 원리인 작업 증명(Reusable Proof-of-Work)을 화폐에 접목하는 실험을 했던 인물이다. 백서가 발표되자마자 소프트웨어를 실행했고 사토시와 직접 10 BTC를 주고받았다. 이후 며칠 동안 그는 사토시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버그를 보고하고 수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사이퍼펑크 커뮤니티에 짧은 문장을 남겼다. “Running bitcoin.(비트코인은 작동한다)” 오늘날 너무나 유명한 비트코인의 시작을 알린 한 줄이었다.

할 피니는 사이퍼펑크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사이퍼펑크는 국가 권력, 거대 기업, 금융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해답을 암호학과 코드에서 찾았다. 할 피니는 이메일 보안 기술 PGP(Pretty Good Privacy)를 개발했고, 사이퍼펑크 메일링리스트에 꾸준히 글을 올리며 “검열 없는 대화의 자유”라는 공동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비극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비트코인의 첫 거래자가 된 지 불과 반년 뒤 2009년 여름 그는 루게릭병(ALS) 진단을 받았다. 건강했던 마라토너였기에 근육이 하나씩 굳어가는 공포를 누구보다 선명히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시선 추적 장치로 커서를 움직이며 문서를 작성했고, 소형 컴퓨터를 개조해 전동휠체어를 제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새 프로세서의 보안 기능을 활용해 비트코인 지갑을 강화하는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비트코인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사토시 나카모토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계속된다. 시간이 갈수록 가장 유력한 이름은 점점 더 한 사람에게 모이고 있다. 바로 할 피니다. 그의 삶은 탈중앙화라는 비트코인의 철학을 온전히 반영했다. 소프트웨어를 초기부터 실행했고, 최초의 전송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비트코인의 작동 원리였던 작업 증명을 이미 연구해왔다. 여기에 언어학적 분석에서도 사토시의 백서와 피니의 글은 문체와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올해 2월 공개된 그의 마지막 인터뷰 영상은 이런 해석에 더욱 힘을 보탰다.

지금 세계는 또 다른 디지털 자산을 만들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은 CBDC를 연구·발행하고 민간 기업들은 달러나 유로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내놓는다. STO라 불리는 증권형 토큰은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되고 있다. 모두 블록체인과 암호 기술을 활용하지만 그 목적은 대체로 통제와 효율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새로운 디지털 자산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고 있는가. 지금 비트코인이 이뤄낸 강력한 영향력은 ‘자유를 향한 열망’에서 비롯됐다. 만약 그 열망이 빠져 있다면 어떤 프로젝트라도 결국 멈출 수밖에 없다. 왜냐. 기존의 시스템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할 피니는 그 답을 이미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단순히 비트코인의 첫 사용자나 사토시의 동료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평생 증명한 열정적인 증언자였다. 우리가 바로 지금 그의 이름을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다.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