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본격화되면서 다양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많은 논의가 발행 규모나 유통 방식 같은 ‘코인’의 운영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어, 더 근본적인 기회를 놓칠 우려가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체는 이미 검증된 기술로 비교적 간단하게 구현 가능하다. 진정한 도전과 기회는 그 스테이블코인이 작동할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기술 표준'을 어떻게 설계하고 확립하느냐에 있다. TCP/IP가 인터넷의 표준이 되었듯, 블록체인 금융의 기술 표준을 선점하는 국가가 향후 수십 년간 디지털 금융 생태계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퍼블릭 블록체인은 투명성과 검열 저항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제도권 금융 인프라로는 부적합하다. 모든 거래가 공개되는 환경에서는 개인의 민감한 정보와 기업의 전략적 정보가 노출되고, 효과적인 범죄 자금 차단 메커니즘의 부재는 규제 당국의 수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블록체인의 혁신성은 유지하되 현실 금융의 요구사항을 충족하는 새로운 기술 아키텍처다.
일부에서는 차세대 금융 인프라의 해답으로 CBDC나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언급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결국 세계적 표준과 분리된 단절된 금융 생태계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근 주목받는 ‘규제 친화적 개방형 체인(Regulated Open Chain)’은 기존의 논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블록체인 기술이 직면해온 세 가지 핵심 과제인 탈중앙화, 확장성, 보안에 ‘규제 준수’라는 추가 요소를 결합해, 제도와 기술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든다. 철저한 원칙론자들에게는 철학적 타협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블록체인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대중적 인프라로 자리 잡기 위해 거쳐야 할 불가피한 전환 과정이다.
이미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이러한 '규제 친화적 개방형 블록체인' 표준 경쟁에 뛰어들었다. 서클의 Arc, 로빈후드의 레이어2 프로젝트는 단순한 제품 개발이 아니라 미래 금융 인프라의 기술 표준을 정의하려는 시도다. 예컨데 서클의 레이어1 블록체인 Arc는 규제당국이 필요 시에 스테이블코인 거래를 열람할 수 있되, 그 기록을 일반 유저에게도 투명하게 공개하는 기능이 구현되어 있다. 2025년 현재 스테이블코인이 국경 간 결제의 3%를 처리하며 급성장하는 지금, 기술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곧 글로벌 금융 인프라의 설계 권한을 확보하는 것과 같다.
한국이 구축해야 할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핵심 기술 스펙은 다음 5가지 축을 중심으로 정밀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첫째, 영지식 증명 기반 선택적 투명성 아키텍처다. 이는 마치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고도 성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술과 같다. 거래가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보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들은 경쟁사에 민감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투명한 거래를 할 수 있고, 규제 당국은 필요시 특별한 권한으로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차세대 신원 인증 프레임워크다. 현재 금융 시스템의 고객확인(KYC)과 기업실사(KYB)를 넘어, AI 시대를 대비한 새로운 개념인 KYA(Know Your Agent)를 도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AI가 자동으로 주식 거래를 할 때 그 AI가 누가 만들었고, 어떤 원칙으로 작동하며, 문제 발생 시 누가 책임지는지를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추적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마치 자동차 번호판처럼 AI에게도 고유한 신분증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아직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체계를 만들지 못했기에, 한국이 먼저 표준을 만든다면 AI 금융 시대의 규칙을 주도할 수 있다.
셋째, 계층적 합의 메커니즘과 거버넌스 구조다. 전통적인 블록체인은 모든 거래를 똑같이 처리하지만, 현실 금융에서는 10만원 송금과 100억 송금의 검증 수준이 달라야 한다. 따라서 거래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 검증 강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마치 공항 보안 검색대에서 일반 승객과 VIP, 그리고 의심스러운 승객을 다르게 처리하는 것처럼, 네트워크 참여자들을 규제 감독 노드, 검증 노드, 일반 노드로 구분하여 각각 다른 역할과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넷째, 동적 규제 적응 엔진이다. 각국의 금융 규제는 수시로 바뀌는데, 현재는 이를 반영하려면 시스템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개발할 시스템은 마치 스마트폰 앱이 자동 업데이트되듯, 규제 변화를 실시간으로 인식하고 자동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해외 송금 한도가 바뀌면 시스템이 이를 즉시 반영하여 새로운 규정에 맞게 작동하도록 하는 '살아있는 규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다섯째, 범용 크로스체인 상호운용성 프로토콜이다. 이미 다양한 크로스체인 브릿지와 상호운용 기술이 존재하지만, 규제 친화적 체인이 기존의 퍼블릭 블록체인들과 매끄럽게 연결되고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더리움, 코스모스, 폴카닷 등 주요 블록체인과 자산을 주고받을 때, 단순히 기술적 호환성만이 아니라 각 체인의 규제 요구사항과 우리의 규제 프레임워크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지능형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이는 개방성을 유지하면서도 규제 준수를 보장하는 핵심 기술로, 글로벌 생태계와의 연결성 없이는 '갈라파고스 금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기술 스펙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각 요소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발전시켜 국제 표준으로 확립한다면, 이는 단순한 국내 활용을 넘어 글로벌 금융기술 수출의 핵심 상품이 될 것이다. 영지식 증명 최적화 솔루션, KYA 인증 프레임워크, 규제 정책 엔진 등은 각각 독립적인 기술 패키지로 상품화가 가능하며, 자체 디지털 화폐를 준비하는 신흥국들에게는 검증된 토탈 솔루션으로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이 이미 보유한 전자정부 시스템 수출 경험과 결합한다면, '디지털 금융 인프라 수출'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 표준의 가치는 네트워크 효과에서 나온다. TCP/IP가 인터넷의 표준이 된 것은 기술적 우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용자와 개발자가 채택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블록체인 금융 표준도 먼저 임계점을 달성하는 쪽이 시장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이미 높은 디지털 금융 침투율, 활발한 블록체인 생태계, 그리고 규제 샌드박스 같은 유연한 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구체적 사용 사례를 결합한다면, 아시아 지역의 디지털 금융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의 성공 지표는 발행량이나 거래량이 아니다. 진정한 성공은 한국이 개발한 기술 표준이 얼마나 많은 국가와 기관에 채택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수익보다는 장기적 영향력에 초점을 맞춘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오픈소스 개발, 국제 표준화 활동, 개발자 생태계 육성,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국가들과의 기술 외교가 핵심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기회는 단순한 신기술 도입이 아니다. 이는 다가올 디지털 금융 시대의 설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규칙을 따르는 추종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역사적 선택의 순간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그 선택을 실현할 전략적 도구이며, 우리가 만들어낼 기술 표준은 미래 세대가 누릴 디지털 금융 주권의 초석이 될 것이다.
■김서준 해시드 대표 약력
△서울과학고 조기졸업
△포항공과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졸업
△노리 최고 제품 책임자(CPO)겸 공동창립자
△해시드 대표이사
△소프트뱅크벤처스 벤처파트너
△국회 4차 산업혁명 특별위원회 자문위원
△교육부 미래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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