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을 성대하게 열어 러시아, 북한 등 26개국 정상과 긴밀한 유대를 과시했다. 미국 등 서방에 대항해 새 국제 질서를 창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도 대외에 천명했다. 반미·반서방 리더로서 무역 전쟁을 벌이는 미국에 정면 대응하고, 중국의 영토 보전과 통일을 강조하며 군사적으로도 물러서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면서 글로벌 ‘신냉전’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중화민족, 폭력 두려워하지 않아”
시 주석은 이날 열병식 기념사에서 “중화민족은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립적이고 강인한 민족”이라며 “중국 인민은 평화와 발전의 길을 지키며 세계 각국 인민과 함께 인류 운명 공동체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시 주석은 이날 오후 리셉션 행사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과 일방주의를 겨냥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며 “인류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는 만큼 한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가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서방에 대항해 새 질서를 창출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라이언 해스 중국센터장은 뉴욕타임스(NYT)에 “시진핑이 중국을 세계 중심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제 질서를 개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 주석은 미국과의 군사적 경쟁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대만 복속 의지를 나타냈다. 그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막을 수 없다”며 “과거 정의와 악, 진보와 반동의 생사가 걸린 투쟁에 직면해 공통의 증오를 품고 저항하며 민족의 생존, 민족의 부흥, 정의를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이어 “군사력 발전을 가속화해 국가 주권과 통일, 영토 보존을 결연히 수호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톈안먼광장 성루 중앙에서 시 주석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왼쪽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오른쪽에 두고 중국의 핵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첨단 무기를 내려다봤다. 미국 CNN방송은 이번 행사에 대해 “이날 군사 퍼레이드의 결정적 이미지는 스텔스 전투기나 핵미사일 행렬이 아니라 시진핑, 푸틴, 김정은이 전례 없는 쇼에 나란히 선 모습”이라고 보도했다.◇꼬이는 北 비핵화·우크라이나 종전한반도 주변 핵보유국 북·중·러가 전승절 기념식을 무대로 사실상 ‘핵 연대’를 선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까지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해온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용인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로 인해 한·미·일 공조를 통한 북한의 비핵화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이유로 북한에 가한 제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북한에 대화를 요구할 때 김정은이 중국을 뒷배 삼아 비핵화 대화를 거부하고 핵 군축 협상을 제안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푸틴 대통령이 전승절 참석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면서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역시 요원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가 이번 무대를 통해 ‘전쟁 국가’라는 오명을 지우고 우호국과의 외교전을 앞세워 서방의 제재를 무력화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이현일 기자/베이징=김은정 특파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