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싱범에 보낸 면허증 사진으로 대출 승인, 대법 "은행 본인확인절차 거쳐…채무 유효"

입력 2025-09-03 17:38
수정 2025-09-04 00:00
보이스피싱으로 명의를 도용해 받은 은행 대출도 충분히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쳤다면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정부가 보이스피싱 피해의 배상 책임 일부를 금융권에도 물리는 방안을 추진 중인 가운데 법원이 금융회사 책임을 엄격하게 제한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제2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인 A씨가 저축은행을 상대로 낸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 판결을 지난달 14일 확정했다.

A씨는 2022년 7월 ‘폰이 먹통돼 임시 번호로 문자 보낸다. 통화가 안 되니 이 번호를 카카오톡 친구에 추가하고 메시지를 보내달라’며 딸을 사칭한 B씨에게 자신의 운전면허증이 찍힌 사진과 은행 계좌번호, 비밀번호 등을 제공했다. B씨의 지시에 따라 스마트폰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앱을 자신의 휴대폰에 설치하기도 했다.

B씨는 A씨 명의로 공동인증서를 발급받고, 저축은행에 A씨 명의 계좌를 개설한 뒤 9000만원을 대출받았다. B씨는 A씨의 운전면허증이 찍힌 사진을 은행에 제출하고 A씨의 스마트폰을 원격으로 조정해 본인 인증, 전자 서명 등 절차를 거쳤다.

A씨는 저축은행이 B씨에게 내준 대출 약정이 자신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니 무효라며 소송을 냈다. 은행은 대출 실행 과정에서 충분히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쳤으니 약정이 유효하다고 맞섰다.

1심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비대면 신분 확인 과정에선 원본을 직접 촬영한 것이 아닌 사본은 인정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비대면 금융 거래에서 금융사는 금융 사고 피해를 방지하고자 노력했음을 담보할 수 있는 수준의 본인 확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2심은 저축은행이 충분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쳤다며 1심 판결을 취소했다. 재판부는 본인 확인 과정에서 제출해야 할 서류가 “반드시 주민등록증 등 실물을 바로 촬영한 파일을 제출하는 경우라고 볼 근거가 없다”며 1심과 판단을 달리했다. 금융사 입장에선 신분증 사본이 원본을 찍은 것인지, 스캔한 사본인지, 사본을 재촬영한 것인지 식별하기가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대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하며 항소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전자문서법상 저축은행으로선 해당 대출이 A씨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