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세기,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히는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의 전시가 두 곳에서 개막했다. 용인 호암미술관과 서울 국제갤러리다. 거대한 거미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 작가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여러 매체로 승화해온 그였지만, 세상이 부르주아를 알아본 건 60세가 넘어서였다. 70여 년에 걸친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는 몇 개의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두 전시를 모두 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호암미술관에서 8월 29일 개막한 '루이스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과 9월 2일 국제갤러리 K2와 한옥 전시장에서 문을 연 'Rocking to Infinity(무한히 흔드는)'를 비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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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 교차 구성의 함정…트라우마만 남았네
호암미술관에서 선보이는 '루이스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은 전 생애에 걸친 작품 106점을 망라한다. 작품 수에선 압도적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펼쳐내느냐는 전적으로 기획자의 역할. 공간과 접근법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는 게 전시 감상의 묘미 다. 그런 점에서 모처럼 날카롭게 비교, 비평을 해볼 기회이기도 하다.
호암 전시는 1940년대 초기 회화와 ‘인물’ 연작, 1990년대 시작된 대형 ‘밀실’ 연작, 말년의 패브릭 작업, 시적 드로잉부터 대형 설치 작품까지 작가의 작업 여정을 따라간다. 삼성문화재단의 소장품 13점, 해외 기관의 소장품도 포함됐다. 전시 제목은 부르주아가 쓴 글에서 차용했다. 일평생 탐구해온 기억, 트라우마, 신체, 시간과 관련한 내면을 압축한다.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이라는 양극의 개념으로 남성과 여성, 과거와 현재, 무의식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정체성과 감정을 포착한다. 그의 일기와 정신분석 기록 등이 전시장 벽에 얇은 핀으로 위태롭게 걸린 점이 상징적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교차 구성을 택한 점, 호암미술관 전시장에 비해 작품의 수가 과도하게 많은 점은 못내 아쉽다. 1940년대 검은 회화('집-여자')와 2006년 작품 '밀실(검은 날들)'이 한 공간에 놓인 것이 단적인 예다.
부르주아는 33년간 정신분석을 받으며 오직 자신을 치유하는 수단으로서 예술을 대했다. '모성'과 '아버지의 파괴'라는 큰 테마는 이어졌지만, 시기별로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파리에서 태어나 뉴욕으로 이주한 시기, 출산과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우울증, 회복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말년 등이 그렇다. 다소 뻔하게 느껴질지언정 부르주아의 작품을 연대기순으로, 또는 특정 시기에 집중해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이 전시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아시아 순회 전시의 일환으로 뉴욕 이스턴 재단과 협력해 기획됐다. 시드니에선 '낮이 밤을 침략했나, 밤이 낮을 침략했나'로, 도쿄에선 '난 지옥에 여러 번 다녀왔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말 멋졌다'로 전시의 제목과 구성이 조금씩 달라졌다.
지난해 도쿄 모리미술관 전시가 호평 받았던 이유는 기나긴 지옥을 통과한 작가의 삶을 관람객이 함께 반추하고, 결국 예술로서 자신을 회복해 나간 과정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황금빛 신체 조각 'Arch of Hysteria'(1993)는 당시 마천루의 단독 전시 공간에 홀로 놓여 많은 이를 명상하게 한 하이라이트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의 병으로 간주되던 '히스테리'의 경련 자세를 남성의 신체로 전복시킨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
이번 호암 전시에선 다른 오브제들과 맥락 없이 놓여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대형 거미 조각과 제니 홀저의 영상 작업 등도 제대로 감상하기에 공간은 비좁다. 106점의 작품을 욱여넣은 방식 탓에 부르주아가 마치 분노와 혼돈에 가득차 평생 고통받았던 인물이라는 잔상만 남는다. 전시는 2026년 1월 4일까지.
국제갤러리-70대 넘어 회복과 화해를 노래한 '거미 여인'
국제갤러리에서 9월 2일 개막한 'Rocking to Infinity(무한히 흔드는)'는 부르주아의 정신세계에 더 섬세하고 친밀하게 다가간다. "인생은 고통이다"라고 말하며 아이러니컬하게도 99세까지 살았던 부르주아. 그의 생애 후반 20년의 작품을 엄선했다. 인생은 고통이지만, 오직 고통으로만 점철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작게나마 희망과 기쁨이 씨앗이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전시의 제목은 아이를 품에 안아 달래는 어머니의 정서적 평온 상태를 환기한다.
K2 전시장은 우선 붉은 색이 압도한다. 4개의 벽면을 수평의 4열로 나눠 하나의 열마다 연작들을 배치했다. 맨 윗줄에는 과슈로 작업한 '손 드로잉'이 놓였다. 오선지가 그려진 종이 위에 세 개의 손. 한 손에 결혼 반지를 낀 부르주아 자신의 손과 두 개의 다른 손이 마치 즉흥곡의 음표처럼 그려졌다. 이 작품은 '아침 10시, 네가 나에게 오는 시간(10AM is When You Come to Me)'(2006) 연작. 1980년부터 약 30년에 걸쳐 부르주아의 조수로 일했던 제리 고로보이가 작업을 위해 그를 집으로 데리러 오는 시간을 상징한다.
그 아래엔 직물 연작인 '하루의 시간들(Hours of the Day)'(2006)이 놓였다. 24시간을 표기한 둥근 시계에 글을 적어 마음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마치 한 편의 시화집을 완독한 것처럼. 평생 모성에 천착했던 부르주아의 엄마와 아이 연작, 물감이 마르지 않은 표면 위에 새로운 젖은 물감을 덧칠하는 '웻 온 웻(wet-on-on)' 기법의 부드러운 추상 '붉은 색(Rouge)'(2008)연작이 하단부를 장식한다. 독립된 각각의 선율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대위법처럼 각각의 시리즈는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진다.
수평으로 놓인 평면 작품들을 수직으로 분할하는 세 점의 조각은 공간에 리듬감을 더한다. 조각 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무한한 순환'. 1999년 작품인 '분수(Fountain)'은 숫자 8을 연상시키고, 하늘에 위태로운듯 매달린 알루미늄 조각 '커플'(2008-2009)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게 두 사람을 결합한다.
사람의 살결과 비슷한 분홍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무제 (No.5)'(1998)가 가장 인상적이다. 네 개의 손이 서로의 팔목을 맞잡고 있어 사람도 거뜬히 앉을 수 있다는 '천사의 의자(Angel's Chair)'를 상징한다. 고로보이와의 정서적 유대감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필립 라라 스미스 이스턴재단 큐레이터는 "모든 작품은 그녀의 일기장과도 같았다"며 "숫자 8과 나선의 형태, 원형의 시계 등의 모티프는 무한한 순환을 상징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선 한옥 공간을 놓치지 말것. 1994년에 제작, 전시된 후 최초로 공개된 부르주아의 '커피 필터 드로잉'이 걸렸다. 원형의 커피 필터 위에 기하학적 추상과 자연스러운 얼룩 등이 어우러진다. 부르주아는 일상에서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다수 사용했는데, 커피 필터 역시 주방 어디에나 있던 흔한 재료였다고.
총 25점의 커피 필터 드로잉 중 16점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스미스는 "둥근 모양의 커피 필터 드로잉은 주로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림을 그린 르네상스 양식 '톤도'를 연상시킨다"며 "작가가 살아 있었다면, 이 한옥 공간에 걸린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을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