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기기 전문업체 유원메디텍은 2003년 창사 이후 처음 겪는 일이 올해 잇따라 일어났다. 주력 제품인 수술용 투관침(수술기구 통로)의 품질을 10년간 개선한 끝에 지난 4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인증을 받았다. 곧바로 미국 업체와 협상에 들어가 대규모 수출 계약을 눈앞에 뒀지만 미국 정부의 15% 상호관세 부과로 수출길이 막혔다. 물류비에 관세를 포함하면 미국 제품보다 가격이 높아져서다. 유원메디텍 관계자는 “올해 말 FDA 인증 취득이 예상되는 제품이 또 있는데 미국 관세 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여전히 대미 수출은 불투명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 40년 거래하다 수출 중단미국이 지난 3월 한국 제품에 상호 관세(15%)와 철강·알루미늄 품목별 관세(50%)를 부과한 지 반년이 지났다. 다 잡은 대형 수주 계약이 하루아침에 틀어지고 관세 부담으로 가격 경쟁력을 잃은 수출품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관세 대상을 늘려달라는 자국 기업 요청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어 대미 수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 관세 피해가 가장 큰 품목은 철강 제품이다. 올초까지 미국 시장을 장악한 국내 철강 제품 수출량은 최대 4분의 1토막 났다. 그 충격은 회사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미국 수출 비중이 80%인 배관용·구조용 강관회사 휴스틸은 올 상반기 매출이 309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줄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65억원 흑자에서 32억원 손실로 적자 전환했다. 회사 관계자는 “미국에 40년 가까이 수출할 정도로 품질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 무관세 혜택을 받는 멕시코산과 캐나다산에 밀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국내 1위 송유관·배관용 강관회사인 넥스틸도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 고율 관세가 적용된 지 3개월 만에 이 회사의 영업이익은 15% 가까이 줄었다.
관세 탓에 수출 계약이 뒤집히는 일은 다반사다. 배관용 자재 제조사 유니락은 지난 5월 15억원 규모의 미국 수출 계약을 날렸다. 계약 성사 직전 25%의 관세가 부과된 데 이어 6월에 관세율이 50%로 치솟자 미국 바이어가 두 달간 협상을 끌다가 결국 계약을 포기했다.
관세폭탄을 피한 기업 중 일부는 반덤핑 조사 대상에 올랐다. 한국의 한 화학회사는 자동차·스마트폰 코팅 및 반도체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등과 관련해 반덤핑 조사를 받고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5월 “한국과 대만 기업의 덤핑으로 미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산업 피해 예비판정을 내렸다. 미국 상무부는 덤핑 마진율을 산정한 뒤 이달에 예비 마진율을 발표할 계획이다. ◇ ‘돌발 관세 부과’에 기업들 시름제각각인 관세율로 인해 한국 기업들은 혼란에 빠졌다. 미국 기업들의 잇따른 관세 청원으로 지난달부터 자동차용 베어링은 15% 관세율을 적용받고 있다. 하지만 농기계에 사용된 베어링은 50% 관세가 부과된다.
베어링 제조사 셰플러코리아의 이병찬 대표는 “자동차와 농기계처럼 어떤 완제품에 들어간 베어링이냐에 따라 다른 관세가 붙는다”며 “향후 추가 품목이 관세에 반영될 수 있어 경영계획을 세우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구리 관련 업체도 고무줄 관세율로 날벼락을 맞았다. 미국 정부는 7월 수입 구리와 파생상품에 50% 관세를 매겼다. 그러자 글로벌 기업인 파커하니핀은 2020년 황동소재부품 제조사 에쎈테크와 체결한 계약을 파기했다. 관세 없이 납품가를 낮출 수 있는 곳으로 공급처를 바꾸려는 조치였다.
미국 송유관 신호케이블 시장에서 30% 점유율을 차지한 키스트론도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 이후 수주량이 급감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매월 150t 수준이던 대미 수출량이 지난달 40t 규모로 줄었고 남아 있는 수출계약은 전무한 상태”라고 말했다.
황동 소재 업체인 대창의 조시영 회장은 “경쟁 업체들이 몰려 있는 중국과 멕시코의 대미 관세율이 어떻게 확정되느냐가 미국 수출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