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100조 벌크업'…은행·PEF 제치고 기업에 수조원씩 '베팅'

입력 2025-09-02 17:58
수정 2025-09-08 18:12
지난 7월 메리츠증권이 5조원 규모 SK이노베이션 자산 유동화 거래를 따내자 금융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국내 증권사가 글로벌 사모펀드(PEF), 시중은행 등을 제치고 초대형 딜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과거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증권사가 창의적 구조를 짜 전방위 자금 지원에 나서면서 전통 금융회사들과 무한 경쟁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국내 증권사들이 무서운 속도로 덩치를 키우면서 금융산업의 판을 흔들고 있다. 증권업 전체 자기자본이 100조원을 돌파해 4대 은행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올 들어서는 종합투자계좌(IMA) 사업 요건(자기자본 8조원)을 따내기 위해 앞다퉈 증자에 나서는 등 ‘몸집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 체급 올린 증권사, 투자방식도 진화2일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증권사와 은행 재무 현황을 전수 조사한 결과 최근 3년간 증권사 60곳의 자기자본 증가율은 연평균 10.6%에 달했다. 4대 은행 자기자본 증가율(5.7%)의 두 배에 이른다.

자기자본은 총자산에서 부채를 제외한 금액으로, 기업의 신용도와 재무 안정성을 판단하는 척도다. 금융투자회사는 자기자본으로 링 위의 ‘체급’을 결정한다. 자기자본 3조원 이상인 증권사는 기업 신용공여가 가능하고 4조원을 넘어서면 자기자본의 두 배 한도로 발행어음을 찍을 수 있다.
상반기 자기자본을 가장 많이 불린 증권사는 한국투자증권(10조3238억원)으로 나타났다. 6개월간 1조577억원 늘렸다. 자기자본 1위인 미래에셋증권(12조4190억원)과의 격차를 대폭 줄였다. 메리츠증권(7조7706억원)이 8000억원을 불리며 뒤를 이었다. 키움증권(6조324억원)과 대신증권(3조5883억원)도 각각 4000억원, 2700억여원 늘렸다.

증권사들은 막대한 자기자본을 무기로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자기자본이 많으면 인수합병(M&A)이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초대형 딜에 참여할 ‘입장권’을 얻을 수 있다.

체급을 올린 덕분에 증권사의 자기자본투자(PI) 방식과 규모도 진화했다. 그동안 공모주나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메자닌 채권에 수십억~수백억원씩 투자해 수익을 냈다면 최근엔 인수금융(M&A용 대출)과 공동대출(신디케이션)에 수천억~수조원씩 베팅하고 있다. 은행, 보험사, 연기금 등 큰손과 직접 경쟁하고 있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주식 발행과 거래를 주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사모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핵심 주체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 가열되는 금융권 영토 전쟁증권사가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상품 종류도 다양해졌다. 풍부한 실탄(현금)과 함께 신용도가 높아지면서다. 각종 상품을 구조화한 뒤 매입 약정이나 지급 보증 등 신용 보강을 거쳐 웃돈을 붙여 파는 게 가능해졌다. 발행어음과 우량기업 회사채 등 수익률 연 1~4%대 저위험 상품부터 하이일드펀드, 사모대출펀드 등 연 5~10%대 중위험 상품, 상장지수펀드(ETF), 파생형 랩어카운트 등 고위험 상품을 고루 취급하게 된 배경이다.

자체 신용 기반인 발행어음(연리 2~3%대)은 은행권 예금을 위협할 정도다. 국내 증권사들이 운용하는 발행어음 규모는 지난 6월 말 기준 44조4000억원으로 6개월 만에 약 3조원 불어났다.

증권업권 몸집은 더 빠르게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대형사들이 IMA 인가를 위한 증자 경쟁을 벌이고 있어서다. 인가를 획득하면 발행어음을 자기자본의 300%까지 발행·판매할 수 있다. 그동안 발행어음 사업에 나서지 않은 삼성·신한투자·메리츠·하나·키움증권 등도 이 시장 진출을 공언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퇴직연금, 프라이빗뱅킹(PB) 분야에서 은행, 보험 등 거대 금융사와 맞붙은 데 이어 은행 안방인 2500조원 규모 예·적금 시장에서도 고객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며 “외화예금·환전과 간편결제, 디지털 자산 관리, 토큰증권(STO) 등 여러 분야에서 사활을 건 업권 경쟁이 달아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