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대일(對日) 정책을 이끌었던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과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각각 지난 4월, 5월 별세한 뒤 일본 외교가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두 고인이 공동 집필해 2000년 처음 발표한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는 21세기 미·일 동맹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작년까지 총 여섯 차례 나온 이 보고서는 양국 동맹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정계와 언론은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미·일 동맹을 지탱한 거목이 떠났다”며 추모했다. 제조업 공동화의 무서움두 명의 거두를 잃은 지금, 미국 내 ‘지일파의 종언’ 위기가 왔다는 게 일본의 더 큰 고민이다. 미국에서 지일파 명맥이 끊긴 것은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경제력이 추락하자 일본을 연구하는 엘리트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2023년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4%로, 30년 만에 4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지배적 위치를 잃자 연구 대상으로서 관심도 함께 떨어졌다.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은 1985년 플라자합의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주요 5개국(G5)은 달러 약세 유도를 목적으로 공동 개입에 나섰다.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240엔대에서 불과 2년 만에 달러당 120엔대로 급락(엔화 가치 상승)했다. 달러 표시 일본산 제품 가격이 두 배로 폭등한 것이다. 이에 수출 기업은 일본에 투자하는 대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는 일본 내 제조업 공동화(空洞化)를 불렀고, 실물 경기를 급격히 둔화시켰다. 일본 경제가 지금까지도 가장 아파하는 부분이다.
오랜 기간 침체하던 일본 경제가 다시 꿈틀대는 것은 기업의 자국 내 설비투자가 늘면서다. 일본 기업의 설비투자는 2023년 101조엔을 기록하며 버블 경제 정점이던 1991년 이후 32년 만에 100조엔대를 회복했다. 작년 설비투자는 105조엔으로 2년 연속 100조엔을 넘어섰다. 일본 경제가 올해 2분기까지 다섯 분기 연속 성장한 것은 설비투자가 실질 기준 다섯 분기 연속으로 직전 분기 증가율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법인세 탓에 기업 떠날 것일본도 하반기는 낙관할 수 없다. 미국의 고율 관세에 대응해 자국에서 투자하는 대신 미국으로 옮기려는 일본 기업이 늘면서다. 또다시 불거진 제조업 공동화 우려에 일본 정부는 곧바로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경제산업성은 올해 세제개편안에 ‘대담한 투자 촉진 세제’ 신설 방안을 담았다. 투자액의 일정 비율을 법인세에서 공제하는 세액공제 방식이다. 설비투자비 전액을 첫해에 일괄 손금산입할 수 있는 ‘즉시 상각’ 제도 도입도 요구했다. 연구개발(R&D)에 적극적인 기업의 법인세를 깎아주는 제도는 연장을 추진한다.
관세 폭탄을 맞은 자국 기업의 세 부담 경감에 힘쓰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증세에 나섰다. 이재명 정부는 첫 세제개편안에서 법인세율을 과세표준 4개 구간 모두 1%포인트씩 올려 최고세율을 25%로 인상하기로 했다. 대기업 세 부담은 5년간 16조8000억원 늘어날 전망이다. 제조업 공동화의 무서움을 모르니 용감하다. 국책연구기관인 조세재정연구원마저 경쟁국보다 법인세 부담이 높다면 기업의 해외 이전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세제개편은 한국판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