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법사에 일대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는 대법관 30명 증원안은 ‘상고심 업무 부담 해소’가 표면적 명분이다. 하지만 기폭제는 따로 있다. 대법원이 지난 5월 1일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면서 논란이 불붙었다. 이튿날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법관을 현행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야말로 노골적인 타이밍이었다.
대법관 증원을 비롯해 민주당이 추진 중인 5대 사법개혁안을 놓고 당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판사 출신 박희승 의원은 지난 19일 당 사법개혁특별위원회 공청회에서 “1·2심 사실심 보강을 먼저 하고 대법관 증원으로 나아가야지, 대법관 수를 늘리면 ‘정의 실현’인 것처럼 하는 건 곤란하다”며 “세계적으로 대법관이 9~15명인 나라가 대부분이고, 많은 곳은 프랑스와 독일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독일·프랑스 ‘소부’ 중심 운영
31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항소심에 불복해 대법원에 접수된 상고 사건은 10년 평균(2014~2023년) 연간 4만4000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2명이 1인당 4000건씩 떠안는 셈이다. 이에 따라 민사 사건 70%가 판결 이유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처리되는 게 현실이다.
한국과 같은 대륙법 체계인 독일 연방대법원(BGH)과 프랑스 파기원은 각각 120명, 85명 정도의 대법관이 전문 분야별로 세분된 업무를 담당하면서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나라 대법관 수가 많은 것은 우리와 역사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프랑스의 경우 대혁명 이후 소수 법관의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사법부를 행정 조직 아래 두는 ‘2권’ 분립적 형태로 설계했고, 독일은 사법부가 나치에 협조한 데 대한 반성으로 분야별 대법원을 설치해 권력을 쪼갰다.
독일은 민사 13개, 형사 6개 등 19개 전문 상고부로 세분화해 각 5인 합의부가 담당 영역만 전담 처리한다. 반면 한국은 법률상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이 함께 결정하는 ‘전원합의체’가 중심이어서 독일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흥미롭게도 15년 전 상황은 지금과 정반대였다.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 한나라당은 ‘대법관 24명 증원안’을 추진했지만, 민주당이 “사법독립 침해”라며 강력 반발해 무산됐다. ◇ “상고제도 고쳐라”…해외선 사전심사 엄격법조계는 대법관 증원과 함께 상고제도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해외 주요국은 한국과 달리 상고 사전심사로 사건을 엄격히 걸러낸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이 연간 7000여 건의 상고 청구를 받지만, 실제 심리가 이뤄지는 건 80여 건뿐이다. ‘룰 오브 포’ 제도를 통해 9명 중 4명이 동의해야 사건을 심리하는 엄격한 허가제를 운용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원심법원의 1차 상고허가와 연방대법원의 ‘불허가항고’ 심사라는 2단계 과정을 통해 사건을 선별한다. 프랑스 파기원은 ‘이유불기재 기각 제도’를 통해 상고 요건이 결여돼 있거나 명백한 파기 사유가 없는 사건을 3인 제한합의부에서 간이 처리해 전체 민사 사건의 20%를 종결시킨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헌법 위반이나 중대한 법적 쟁점이 있는 사건만 선별하는 ‘상고수리신청 제도’를 운영한다.
한국은 2014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 신설안’, 2022년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상고심사제 및 대법관 18명 증원안’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 미국은 증원 실패, 베네수엘라는 성공정치권에선 베네수엘라 등에서 정권이 사법부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대법관 증원을 악용한 전례가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04년 좌파 성향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대법관을 20명에서 32명으로 늘리면서 추가된 12명을 모두 친정부 성향으로 임명했다. 멕시코도 지난 6월 연방 판사 881명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친여 성향 판사가 대거 당선되면서 사법부 정치화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이 보수화된 연방대법원을 견제하려고 9명에서 13명으로 증원을 시도했지만, 민주당 내 반대와 사회적 논란으로 좌초했다.
현재 대법원은 이재명 대통령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10 대 2로 파기환송 판결을 한 바 있어 증원을 통한 구성 변화가 주요 정치적 사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대통령 임기 내에 추가 16명을 모두 임명하는 것 자체가 대법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민주당 5대 사법개혁안에 포함된 ‘외부 법관평가제도 도입’을 두고 재판 독립성 침해 논란도 거세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대표발의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국회와 법률가단체, 법원 내부 구성원 각 5명씩 모두 15명으로 구성된 법관평가위원회가 법관 근무평정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 연임과 인사에 반영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하급심 공동화’ 등 부작용 우려법조계에서는 급격한 대법관 증원은 ‘하급심 공동화’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대법원 재판연구원 130명 중 100명이 14년 차 이상의 판사 출신인데, 대법관이 늘어나면 1·2심 법원에서 또 판사 100여 명을 빼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급심 심리와 재판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운영도 어려워진다. 대법원 관계자는 “30명 전원합의체는 토론이 아닌 거수로 결정하는 식밖에 안 된다”며 “민사·형사부로 나눠 전원합의체를 운영하려면 법 개정안에 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비용 부담 역시 만만치 않다. 국회예산정책처 추계에 따르면 대법관과 비서관을 16명씩 증원하는 경우 5년간 총 286억7900만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대법관과 비서관 1명만 계산한 최소 추계다. 실제로는 대법관 1명당 부속실 직원, 운전원 등 약 5명을 배치해야 해 부담이 더 커진다.
대법원은 아직 대법관 증원과 관련한 자체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입법권을 쥔 국회, 그중에서도 여당의 움직임을 지켜보겠다는 분위기다. 법조계 관계자는 “법원 내부에서도 대법관 증원 자체엔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증원이 필요하다면 대법원도 자체안을 제시해 공론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