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기업을 조사할 때 사측과 변호사가 나눈 대화 내용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는 ‘비닉특권(ACP·attorney client privilege)’을 기업에 부여하기로 미국 측에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31일 통상 관계자들에 따르면 양국 정부는 지난 25일 한·미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이 같은 내용에 사실상 합의했다. 미국은 그동안 공정위 등의 현장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미국 기업의 경영을 옥죈다고 주장해 왔다.
비닉특권(秘匿特權)은 의뢰인이 변호사와 교신한 내용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는 권리다. 한국에서는 아직 법제화 되지 않고 있다. 변호사 사무실 압수수색이 흔하다 보니 국내 로펌이 의뢰인과 민감한 대화를 할 때 해외 서버를 이용하는 경우가 늘어날 정도다.
공정거래 분야에 비닉특권이 도입되면 이는 국내에서 관련 규정이 신설되는 첫 사례가 될 전망이다. 미국은 범죄 우려가 있거나 법원 지시가 있는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상황에서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비밀을 광범위하게 보장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영국 일본 등 주요국은 대부분 기업이 경쟁당국에 대항할 권리로서 비닉특권을 인정하고 있다. 일본 공정위는 2019년 6월 카르텔과 입찰 담합 등에 대해 기업의 비밀유지권을 보호하는 내용으로 독점금지법(AMA)을 개정해 2020년 말부터 시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꾸준히 비닉특권 도입 논의가 있었다. 여야 국회의원이 관련 법을 발의한 것도 여러 차례다. 검·경 압수수색에 대응하는 비닉특권을 도입할 경우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공정위 등의 실무 관행을 바꾸는 정도라면 행정규칙으로도 가능하다. 한·미 협상도 행정부 간 약속인 만큼 입법 절차 없이 행정규칙 변경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비닉특권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국내기업의 준법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내 기업이 법적으로 예민한 사안일수록 법률 검토를 받지 않거나 심층분석 대신 간단히 구두로만 가부를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수사, 조사기관이 이를 확보했을 때 불리하기 때문”이라면서 “환자가 아픈 것이 알려질까봐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