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벤자민 브리튼의 걸작 오페라 '한 여름밤의 꿈'이 재공연됐다. 좀처럼 국내에서 보기 힘든 브리튼 오페라의 재공연 소식에 국내 오페라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해 국립오페라단(단장 겸 예술감독 최상호)이 한국 초연했을 당시에도 작품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막이 오르자 무대 위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여왕 티타니아가 등장한다. 오페라는 그들의 부부싸움을 시작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오베론은 퍽을 불러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사랑에 빠지게 하는 꽃을 따올 것을 지시한다. 퍽은 "40분 내에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찾아오겠다"며 무대를 빠져나간다.
브리튼은 요정 '퍽'을 오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파격적인 인물로 탄생시켰다. 그는 자신이 쓴 악보에 퍽을 성부가 아닌 '아크로바틱 스피킹 롤'이라고 소개했다. 오페라 무대에 등장하는 여느 역할과 달리 대사와 몸짓, 곡예적 동작만으로 극을 이끄는 퍽은 작품에 연극적이고 희극적인 요소를 가미한다.
퍽을 소화한 뮤지컬 배우 김동완은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동안 몸을 아끼지 않아 큰 박수를 받았다.
여느 오페라와 비교해 많은 성악가가 출연하는 이 작품을 위해 국립오페라단이 섭외한 대부분의 성악가는 탁월한 가창력과 연기를 선보였다. 국내 오페라 제작자들 사이에서 현시대 한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정답'으로 인정받는 이혜정은 티타니아 역으로 다시 한번 실력을 증명했다. 네 명의 연인들도 해외 프로덕션과 견줄만한 훌륭한 가창을 선보였다. 메조소프라노 정주연(헤르미아 역)은 오페라하우스를 가득 울려내는 성량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테너 김효종(라이샌더 역)은 특유의 서정적인 음색과 영어 딕션 표현으로 작품에 고급스러움을 입혔다. 소프라노 윤상아(헬레나 역)도 작은 체구답지 않은 폭발적인 성량을 들려줬다. 바리톤 최병혁(디미트리어스 역)은 영국 웨일 출신 세계적 바리톤 브린 터펠을 연상케 하는 음색으로 노래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에서 6명의 장인도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브리튼은 3막의 '극중극'(연극)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지닌 연극적 요소를 살렸다. 베이스 박의현(퀸스 역)과 최공석(스너그 역)은 저마다의 짙은 저음과 자연스러운 연기로 노래했다. 테너 강도호(플루트 역)는 익살스러운 음색으로 극 중 음치인 플루트 역을 노래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할만한 '목소리 연기력'을 겸비한 희극적 테너(Spiel Tenor)로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 들어, 국내 여러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 중인 바리톤 박은원(보텀 역)은 힘 있는 목소리와 능청스럽고 익살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브리튼이 남긴 오페라에는 비교되는 카운터테너의 두 역할이 있다. '나사의 회전'에 등장하는 마일즈와 '한 여름밤의 꿈'의 오베론이다. 마일즈가 귀신에 홀려 공포를 느끼는 유약한 보이소프라노 음역으로 노래하는것과 달리, 오베론은 셰익스피어가 원작을 발표한 당시 활동했던 거세한 '카스트라토'를 그려낸 인물이다. 변성기를 막기 위해 거세한 남자 성악가는 성인 귀족 남성의 모습에 인간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목소리로 노래해 신비롭고 기이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날, 오베론 역을 노래한 카운터테너 장정권이 모든 등장인물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1막 처음, 영화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흐른다'의 노쇠한 브래드 피트의 모습으로 등장한 그는 극이 흐를수록 모습이 젊어졌다. 2막에서 그는 남성 권력자의 모습으로 변모해 당당한 모습으로 노래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노래한 그의 무대는 시대를 넘어 등장한 카스트라토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한경아르떼필을 이끈 지휘자 홍석원은 오페라 전문 지휘자다웠다. 까다로운 브리튼의 관현악을 한 번의 실수 없이 지휘했다. 퍽의 익살스러운 성격과 라이트 모티브(유도동기)로 연결된 트럼펫의 고난도 솔로를 선보인 한경필의 김승언 수석, 플루트의 불협 노래에 맞춰 도니체티의 오페라, 루치아의 오마주를 연주한 플루티스트 최유나의 솔로 연주도 관객이 음악을 통해 작품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했다. 스네어 드럼을 연주한 오미정과 오베론의 가창을 뒷받침해준 정이와의 쳄발로 연주도 탁월했다.
'영국은 언젠가는 인도를 잃게 되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Indian Empire will go, at any rate some day, but this Shakspeare does not go, he lasts forever with us.)'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이 자신의 저서 '영웅 숭배론'에 쓴 말이다. 이 문장은 영국인들의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에 대한 사랑을 반증한다.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말로 와전됐을 정도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 여름밤의 꿈'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영국인의 사랑은 대단하다. 18세기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은 자신이 발견한 천왕성의 두 위성에 '한 여름 밤의 꿈'의 두 주인공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이름을 붙였다. 영국의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춤추는 요정들과 함께 있는 오베론과 티타니아와 퍽'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강강술래를 연상시키는 요정들의 춤동작은 20세기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의 연작 '댄스'의 모티브가 됐다.
'한 여름밤의 꿈'은 천문과 미술을 넘어 결국 영국 음악에도 닿았다.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이 드디어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보다 앞서 독일의 멘델스존이 이 작품에 음악을 헌정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래와 음악을 입힌 브리튼은 이 오페라를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재탄생시켰다.
최상호 단장이 이끄는 국립오페라단의 축적된 제작 노하우는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오페라뿐 아니라, 특유의 희극적 색채를 지닌 영국 오페라에도 잘 통했다. 한국적 소재로 창작·발표를 앞둔 국립오페라의 차기작 <화전가>가 해외에서도 인정 받는 작품으로 제작되는것이 많은 국내 오페라 팬들의 바람이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