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스타' 이병헌 "원작 읽는 대신 '이것' 고민" [여기는 베니스]

입력 2025-08-31 06:58
수정 2025-08-31 07:28


“박찬욱 감독님하고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었던) 25년 전부터 밥친구, 술친구로 편하게 지내왔어요. 그러다 보니 잘 몰랐던 것 같은데,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영화계 사람들이 찾아와 감독님에게 ‘영화 정말 잘 봤다’면서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아 정말이지 대단한 거장이구나’ 느끼게 되더라고요.”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올해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를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거론된다. 영화가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자마자 ‘시대를 관통하는 풍자극’이라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30일(현지시간)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리도섬에서 만난 배우 이병헌은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른 영화의 성공 요인으로 박 감독이 가진 ‘거장의 아우라’를 꼽았다.



그러나 베니스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어쩔수가없다’는 약간의 잔혹성을 덜어낸 자리에 ‘웃픈(웃기면서 슬픈)’ 유머 한 스푼을 넣은 블랙코미디다. 그간의 필모그래피와 결을 달리하는 이 영화적 실험 속에서도 박찬욱의 미장센이 고스란히 돋보일 수 있었던 데엔 이병헌의 연기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란 평가가 나온다. 마치 비극과 희극을 오가듯, 해고라는 삶의 아이러니 속에서 흔들리는 가장을 냉혹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기 때문. 일각에선 남우주연상 후보로까지 조심스럽게 거론된다.

실제로 베니스에서 이병헌은 박 감독만큼이나 빛나는 스타다. 지난 29일 ‘팔라쪼 델 시네마’에서 열린 레드카펫 행사엔 그를 만나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이들은 이병헌이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리(Lee)”라고 외치며 플래시를 터뜨리고 사인을 요청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동료 배우 이성민이 “한국에서 보는 이병헌과 베니스의 리는 다르다”며 그의 연기와 인기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병헌은 ‘베니스 스타’로 거듭난 자신의 연기가 연출의 의도를 살피는 동시에 연기의 폭을 넓히려는 연구의 결과라는 답을 내놨다. “어둡고 서글픈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순간마다 훅 들어오는 코미디가 있어요. ‘웃기면 웃길수록 좋다’고 감독님이 주문하기도 했고,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 선에서 희극과 비극을 연기하려 했어요. 영화의 기본 정서가 슬프고 쓸쓸한데, 코미디가 얹어지니 ‘이걸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묘한 감정이 들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의 원작이 되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끼>를 한 줄도 읽지 않은 과감한 선택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로는 원작을 읽는 순간 스스로의 창의성이 잘려 나가는 경우가 생겨요. 폭이 좁아진 상태로 캐릭터에 접근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원작을 읽는 것을 조심하는 편이에요. 이번 작업에서도 감독님에게 원작을 읽어야 할지 물었는데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으니 굳이 볼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이야기에 집중하자고 생각을 했어요.”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초반 가족을 끌어안으며 행복감의 젖은 만수와 영화 끝 무렵 경쟁자를 모두 제거한 후 새롭게 일자리를 되찾으며 다시 한번 가족을 끌어안는 만수가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다. 동일한 모습이지만 어딘가 허무하고 텅 빈 느낌이 드러나는 만수의 표정이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병헌은 이 시퀀스를 이렇게 해석했다. “계획한 대로 새 직장을 얻고 집을 팔지 않아도 됐지만, 영혼은 커다란 상처를 입어요. 웃지만 끝내 슬프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거죠.”



연이은 국제영화제 수상 불발, 극장의 침체 등 위기가 이어지는 시점에서 ‘어쩔수가없다’는 한국영화의 희망으로 꼽힌다. 이병헌 역시 영화에 9분의 기립박수를 보낸 베니스에서 한국 영화의 긍정적인 미래를 봤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시리즈로 세계 각국을 다녔을 때는, K콘텐츠의 힘이라기보단 ‘오겜 효과’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베니스에 와보니 K무비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느꼈어요. 옛날에는 마니악한 B급 문화로 받아들여졌다면, 지금은 분명 주류로 가고 있다고 봐요.”

이병헌은 오는 6일 황금사자상과 남우주연상 등 주요 수상결과가 발표되는 폐막까지 베니스에 머무를 예정이다. 이후 곧장 캐나다에서 열리는 토론토국제영화제를 찾았다가, 다음 달 17일 개막하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베네치아=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