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성리학적 사이비 근대국가의 비극

입력 2025-08-28 17:30
수정 2025-08-29 00:12
‘인문사회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연구하자는 다짐이 제도화된 것일 뿐이다. ‘엄정한 의미의’ 과학(science)이란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 공학 같은 응용과학, 인공지능 같은 첨단과학 등에 국한된다. 하지만 중세 서유럽의 가톨릭 같은 종교 말고도 조선 성리학 같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인문사회과학의 특정 이론이 과학적 진리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있다. 비극이다. 그것이 학문에서의 오만과 오류를 넘어서, 사회를 지배하는 무지와 폭력이 될 수도 있어서다.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리(理)와 기(氣)로 해석한 한국 사회>는 그러한 오만과 오류에 빠지지 않은 좋은 인문사회과학서로서, 그러한 비극(혹은 혼돈) 속에 존재하는 한국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된 일본 출판사 코단샤(講談社) 1998년 신서판과 2011년 문고판 ‘작가의 말’ 각각을 공히 읽어 보면 지한파이자 친한파인 저자가 한국 ‘내부에서의 외부자’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뇌했는지 알 수 있다. 성리학(性理學)은 ‘리(理)’와 ‘기(氣)’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들을 설명한다. 리가 도덕과 이념이라면 기는 욕망과 현실이고, 리는 기를 지배해야 마땅하다.

오구라 기조는 한국의 특성을 리에 대한 집착에서 찾는다. 한국은 ‘도덕 지향적이다’. 이 말이, 한국이 도덕적이라는 뜻은 아님에도, 한국에는 항상 도덕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해 권력을 잡는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삶을 고통스러워하는가? 한국의 실체가 ‘철학(理)’이어서만이 아니라, ‘단 하나의’ 철학을 지향하는 성향이 형성돼 있어서다. 한국 전체와 한국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성리학의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오구라 기조는 ‘다양하게’ 제시하며 숙고한다. 반면, 실제로는 기가 기승인 한국의 양면성(모순)이 한국의 역동성이 되기도 한다는 점 또한, 역동성이 소멸된 일본의 약함과 함께 거론한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더 깊게 성찰해야 한다. 리는 연역적이어서, 리 지향적인 한국인의 사고체계는 실증적이지 않다. 증거와 절차로 결론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선호하기로 선입견처럼 결정된 것 이외의 것들은 무조건 사악(邪惡)이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다. 이 ‘어두운 정통성 환각’은 올바름(정의로움)으로 포장돼 문화적으로 세대를 넘어서 염색돼 간다. 한국에서는 만사가 정치가 돼버리고, 이 정치가 정쟁도 모자라 사화(士禍)인 까닭은 그래서다. 주자학(朱子學), 즉 성리학은, 남송(南宋)이 여진족 금나라에 실존을 위협받자 주희(朱熹)가 도덕지향성을 이념으로 내세워 중화(中華) 한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든 이론이다. 공산주의 이론이 경제학으로 포장된 사이비 신학(神學)인 것처럼.

주자학은 명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에서 더 독해지고 황당해졌다. 성리학과 공산주의는 성선설(性善說)을 바탕으로, 인간은 개조돼 완성될 수 있다는 리를 공유한다. 인간과 사회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와 상충하는 극단적 관념론들이다. 성리학은 (현대로 치면) 과학 행세를 하는 엉터리 인문사회과학이다. 인간과 세상은 리와 기가 아니다. 물(Water)이 탈레스의 ‘통밥’대로 만물의 근원은 아니듯. 사회가 자본가와 노동자로만 갈라서 있지 않은 것처럼. 물론 성리학의 리와 기는 불상리불상잡(不相離不相雜)하여 서로 떨어져 있지도 않고 뒤섞여 있지도 않은 혼융무간(混融無間)한 관계라고 논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말만 그럴듯할 뿐 현실에서 제대로 수용될 리가 없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되기에는 열등한 비과학적 공상론에 불과하다.

성리학과 공산주의 같은, 즉 리의 독재성이 도덕지향성(도덕성과 동의어가 아닌)이 되는 성향은 필연적으로 위선을 양산하고, 위선 없이는 권력을 쟁취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게 만든다. 정의로운 말과는 정반대로 최악의 관료주의와 ‘위선 사기 특권층’이 공고화된다. 개인의 사랑과 이해마저도 적대적 이분법과 비과학적 도그마가 된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모인 사이비 근대국가가 된다. 한국의 모순된 역동성은 한국을 몰락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우리는 아직도 조선인인가? 한국인의 성리학적 뇌 구조가 한국의 운명이 돼가고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