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兆 단위 과징금 쇼크'에 흔들리는 은행권

입력 2025-08-27 17:36
수정 2025-08-28 00:13
“수조원이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큰 타격인데 그 여파가 10년간 재무제표에 반영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야말로 연쇄 충격입니다.”

최근에 만난 한 시중은행 임원은 한숨을 쉬며 이같이 토로했다. 국내 주요 은행은 각종 사건으로 올해 수조원대 과징금을 내야 할 처지에 내몰려 있다. 징계 수위를 두고 막바지 심사가 진행 중인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와 부동산 담보인정비율(LTV) 담합 사건이 대표적이다. ELS 사건은 금융위원회가 ‘투자원금(판매액)의 50% 이내’로 과징금 기준을 잡으면서 최대 8조원대 제재가 가능하다. LTV 담합은 공정거래위원회가 1조원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은행에 과징금 처분은 단순히 일정 금액이 유출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과징금을 내면 그 금액의 여섯 배가량을 운영 리스크로 인식해 10년 동안 위험가중자산으로 쌓아야 한다. 예컨대 과징금 1조원을 내면 그만큼 자본금이 날아갈 뿐 아니라 위험가중자산 6조원이 새로 생긴다. 보통주자본비율(CET1)은 0.5%포인트 정도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10조원 이상 기업 대출을 할 수 있는 여력이 한 방에 사라지는 셈이다.

물론 충격이 어떻든 간에 그만한 잘못을 했으면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들 사건에서 은행들도 억울한 구석이 있다. ELS 사태는 은행의 부실한 설명 때문에 모든 투자자가 손실을 봤는지 제대로 따져보기도 전에 자율배상이 이뤄졌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 등 5대 은행의 배상액만 1조원이 넘는다. 금융당국은 이 과정에서 “자율배상은 제재 경감 사유가 된다”며 압박했다. 은행들은 “이미 배상까지 했는데 대규모 과징금까지 내라는 건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LTV 담합은 논쟁의 여지가 더 크다. 담합 행위로 지목된 자료 교환 자체는 정부의 가계대출 정책을 따르기 위해 이뤄졌다. LTV를 낮춘 것도 대출액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은행에 득이 될 게 없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과징금 처분이 나오면 일단 해당 금액을 납부하고 소송을 통해 환급 여부를 다퉈야 한다. 설령 승소하더라도 재무적 타격을 입은 채 수년을 버텨야 한다는 점에서 ‘상처뿐인 승리’가 될 수 있다.

은행은 가계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한다는 점에서 공적인 역할도 짊어지고 있다. 지금처럼 저성장·고물가로 서민이 신음하고 대형 화학기업마저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상황에서 은행의 역할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과도한 제재는 경제와 산업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은행을 흔드는 족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