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고전적 건물은 거의 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옷차림을 제한하는 로마 바티칸과는 다르다. 그래서 수백 년 된 건물 안에 편안한 운동복 차림을 한 사람이 무리 지어진 풍경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파리에서도 점잖게 차려 입고 가야 할 것 같은 건축물이 있다. 바로 오페라 가르니에이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19세기 후반 파리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신화를 형상화한 부조와 황금빛 조각이 건물 외관을 장식하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샹들리에와 함께 웅장한 대리석 계단이 방문객을 맞는다. 마치 궁전에 온 느낌이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설계를 맡은 프랑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지을 때부터 이 건물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었다. 나폴레옹 3세의 지휘 아래 지어진 오페라 가르니에는 파리를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빚은 예술작품이었다. 이 건물은 1861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땅 밑에서 발견한 지하 호수와 습지 탓에 기초 공사가 한참이나 늦어졌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제정의 몰락 그리고 파리 코뮌 같은 정치적 격변까지 겪으며 오래도록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페라 가르니에를 완성한 것은 무려 14년이라는 긴 시간 흐른 1875년이었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지하에 흐르는 호수와 샹들리에 추락 사고 같은 일은 파리 시민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독자도 짐작할 것이다. 오페라 가르니에가 소설 ‘오페라의 유령’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의 유령’을 떠올리며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달랐다. 바로 대극장 천장에 있는 마르크 샤갈의 천장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천장화는 샤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표트르 차이콥스키 그리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 같은 위대한 음악가에게 바친 선물이다. 샤갈은 천장화에 오페라와 발레의 여러 장면을 숨은 그림처럼 넣어두었다. 그 속에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펼쳐진다.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껴안고 있기도 하고. 샤갈은 그림 속에 에펠탑과 콩코르드 광장 그리고 오페라 가르니에처럼 파리를 상징하는 장소도 함께 담아냈다. 파리의 랜드마크를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한 샤갈의 솜씨가 돋보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제작 당시에는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샤갈의 천장화가 있는 자리에는 원래 다른 작품이 이미 있었다. 화가 쥘 르네프뵈가 그린 작품이었다. 르네프뵈의 작품은 19세기의 전형적 아카데미 양식의 웅장한 회화였다. 샤갈의 천장화는 이미 있던 작품을 가리고 그 위에 새로 그린 것이다. 이 과감한 결정을 내린 사람은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이다. 말로는 1960년 페루 공식 사절단을 맞이하며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열린 모리스 라벨의 발레 ‘다프니스와 클로에’ 초연을 관람했다.
말로는 그날 고개를 들어 바라본 천장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시대는 변했고 새로운 음악이 울리는데 천장은 여전히 19세기에 갇혀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말로는 그날 가르니에의 낡은 천장화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함께 발레를 관람한 샤갈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샤갈과 친분이 있는 점과 라벨의 공연 속 무대 장치와 의상이 모두 샤갈의 작품이었다는 점이 장관이 샤갈을 선택한 이유가 되었을까?
천장화 교체 계획을 발표하자 바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반대하는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프랑스 제2 제정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오페라 가르니에가 가지고 있는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천장화 교체를 맡은 샤갈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문화 유산을 외국인 화가 손에 맡기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샤갈은 1887년에 지금은 벨라루스가 된 도시 비텝스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 혁명과 전쟁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박해 탓에 여러 도시를 떠돌았다. 그러다가 정착한 파리에서 화가로서 꽃을 피웠다. 안타깝게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 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샤갈에게 파리는 망명지가 아니라 또 다른 고향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외국인으로 보았다.
샤갈은 꿋꿋하게 천장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훼방을 막기 위해 군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천장화를 하나 바꾸는 일이 마치 전투 같았다니! 천장화 교체에 대한 반발은 작품을 설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천장화를 분리할 수 있는 캔버스로 제작하여 이미 있는 르네프외의 고전적 벽화 위에 덧붙인 것이다. 기존 천장화를 철거하는 대신에 말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존 작품도 여전히 샤갈 작품 아래서 숨을 쉬고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원래 있던 천장화를 복원할 수 있는 상태이다. 물론 반대하는 이들을 달래려는 꾀였다. 그 덕에 두 세기의 미술이 한 공간에 포개져 있는 흥미로운 상황이 되었다.
천장화는 1964년 9월 23일에 처음 공개되었다. 모차르트 ‘주피터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이 공연장에 울려퍼지는 동안 거대한 샹들리에가 불을 밝혔다. 불빛이 천장을 비추자 샤갈의 화려한 천장화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은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샤갈의 천장화는 외국인이 프랑스 전통을 바꾸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작품은 오페라 가르니에의 또 다른 전통이 되지 않았는가? 전통은 닫힌 것이 아니라 낯선 외부의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김선경 미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