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8월 29일 10:0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며 사실상 독점적 사업자가 된 한진그룹이 '마이웨이'를 걷고 있다. 산업은행의 만류에도 자사주를 총수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고, 서비스 품질 저하가 우려되는 대한항공 이코노미 좌석 축소를 강행하고 있다. 일각에선 국민 혈세를 지원받아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 한진그룹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산은은 최근 대한항공이 추진하는 이코노미 좌석 개편안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전달했다. 대한항공은 주요 노선에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의 중간 등급 개념인 프리미엄석을 도입하기 위해 기존 이코노미석 배열을 바꾸고 좌석당 너비를 1인치 좁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산은은 이런 정책으로 서비스 품질이 낮아지고, 승객들의 불편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지만 대한항공은 좌석 공간을 축소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산은은 앞서 한진칼이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자사주를 사내복지기금에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할 때도 제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사내복지기금에 자사주를 출연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나 조 회장의 우호 지분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자사주를 소각하는 대신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소액주주들도 불만의 목소리를 냈지만 결정이 달라지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 조 회장이 대한항공 등에서 올 상반기에 받아간 보수가 크게 늘어나며 논란이 가중됐다. 조 회장은 올 상반기에만 한진칼과 대한항공, 진에어 등에서 92억원에 달하는 급여를 받았다. 전년 동기 대비 급여가 42.8% 급증했다. 한진칼과 대한항공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이사 보수 한도를 기존 90억원에서 120억원으로 각각 상향하며 조 회장이 보수를 더 받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진그룹의 이런 행보가 질타를 받는 건 과거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추진할 때 정부 차원의 후방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말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할 때 산업은행은 한진칼에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5000억원을 투입하고 300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인수해 자금을 지원했다. 한진칼은 이 자금으로 대한항공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대한항공은 이를 활용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했다. 항공산업 재편을 위해선 정부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게 산은의 자금 지원 논리였다.
조 회장은 정부의 도움으로 경영권도 지켰다. 당시 조 회장은 행동주의펀드 KCGI와 반도건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이 연대한 3자 연합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산은이 한진칼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해 조 회장의 우군으로 등장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종결됐다. 산은이 아시아나항공의 인수 주체인 대한항공이 아닌 한진칼에 자금을 넣어 국책은행 자금이 조 회장 경영권 방어에 쓰이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산은은 당시 자금 지원 조건으로 한진칼과 투자합의서를 체결했다. 합의서 안에는 산은이 한진칼의 사외이사 선임권을 비롯해 주요경영사항에 대한 사전협의권 및 동의권, 경영평가 실시 권한 등을 갖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합의서에서 정한 위약 사유가 발생하면 5000억원의 위약벌은 물론 조 회장이 보유한 지분을 산은이 가져와 매각할 수 있는 드래그얼롱도 있다.
구속력이 강한 투자합의서를 기반으로 초기에는 조 회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적절히 이뤄졌다. 산은이 "조 회장의 경영 성과가 미흡하면 경영 일선에서 퇴출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절차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한진그룹의 태도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업계에선 자금을 지원하고 투자합의서를 체결한 산은에 한진그룹을 감시 및 견제해야 할 최우선 책임이 있다고 본다. 다만 현실적으로 산은이 투자합의서만 가지고 견제를 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경영평가 성적이 미흡하면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고, 조 회장 지분을 담보로도 잡고 있지만 산은이 나서서 국적 항공사의 총수와 경영진을 문책하고 경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산은이 보유한 한진칼 지분 10.58%를 지렛대 삼아 조 회장을 견제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산은이 해당 지분을 조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세력에게 매각해 경영권을 흔드는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조 회장은 산은 지분을 빼고도 과반이 넘는 우호지분을 확보해 경영권 분쟁 우려를 던 상황이기도 하다. 정부 관계자는 "한진그룹 경영진도 이런 역학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며 "최근 산은도 한진그룹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