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purge)→‘훌륭한 사람이자 리더’(great man and leader).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은 말 그대로 예측불허였다. 외교가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정상회담이라는 관전평이 나올 정도였다. 실무진이 사전 조율을 끝내놓고 정상들은 최종 합의만 하는 일반적인 정상회담과 거리가 있다. 한국 정부는 자칫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1차 정상회담처럼 파행을 겪지 않도록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딱딱했던 회담 초반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는 게 양측 참석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하지만 회담 전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2시간40분 전 자신의 SNS 계정에 ‘한국에 숙청이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전 행정명령 서명식에서도 “한국 정부가 교회를 잔인하게 단속하고, 우리 군사 기지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했다고 들었다”며 “사실이라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회담 시작 시간도 당초 예고보다 30분가량 지연됐고, 회담 초반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분위기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을 보인 미·북 대화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성과를 두고 칭찬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농담을 섞어가며 말했고 종종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정상회담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업무오찬 분위기도 비슷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을 향해 “당신은 전사다” “당신은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지원을 받을 것” 등의 발언을 하며 추켜세웠다고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대통령에게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자 리더(great man and leader)’ ‘한국은 당신과 함께 더 높은 곳에서 놀라운 미래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적힌 자필 메시지를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역대 대통령 초상을 소개하고 참석자들을 안내해 마음에 드는 모자와 골프공, 골프 핀, 와이셔츠, 커프스 핀 등을 고를 것을 제안했다. ◇트럼프 맞춤 선물도 준비
한국 정부는 이번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준비를 했다. 회담 전 미국 측이 한국이 수용하기 힘든 요구를 쏟아냈고, 이와 별개로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돌발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과 참모진은 이를 감안해 시나리오별 대비책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저서 <거래의 기술>을 탐독한 것은 물론이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등 그와 만난 사람들의 조언을 참고해 관심사와 성격을 깊이 분석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금속 거북선, 골드파이브 맞춤형 퍼터, 카우보이 마가(MAGA) 모자, 서명용 만년필 등도 그의 취향을 고려해 준비했다. 특히 골프채는 ‘골프광’인 트럼프 대통령의 신체 조건 등을 고려해 맞춤 제작했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을 상징하는 빨간색 넥타이를 맨 것도 ‘맞춤형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으로 미국 조야 일각에서 품은 친중 이미지를 불식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존 햄리 소장과의 대담에서 정상회담에 대해 “결과는 아주 좋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참모들은 젤렌스키·트럼프 회담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지만, 저는 이미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걱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책을 보면 자신은 상대가 감내하기 어려운 조건을 던지지만 최종적으로 불합리한 결론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써놓았다”며 “한·미 동맹은 매우 중요해서 거기에 큰 상처를 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워싱턴=한재영 기자/이상은 특파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