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의 연출을 맡은 오스트리아 출신 전위예술가 헤르만 니치(Herman Nitsch, 1938~2022)는 공연 중 '페인팅 액션'을 선보였다. 강렬한 색의 물감 1000리터를 쏟아붓듯 캔버스에 표출한 즉흥적 드로잉은 바그너 음악이 불러일으킨 영감을 시각화한 행위였다. 그는 이 작품을 독일어로 '쏟아부은 그림(Schuttbild_2021)'이라 명명하며, 새로운 예술적 성과를 남겼다.
지난 24일, 예술의전당을 찾은 한국 관객들도 전위예술이 압축된 장면을 경험했다. 예술의전당 기획 오페라 갈라 콘서트의 첫 무대,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1막에서다. 막이 열리고, 가난한 시인 로돌포의 이상이 담긴 '시'와 화가 마르첼로의 '추상화'가 관객을 맞았다. 테너 김성호(로돌포 역)와 바리톤 노동용(마르첼로 역)은 벽면에 물감을 칠하고, 장난을 치며 연기했다. 이 시각적 연출은 관객에게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공감을 극대화했다.
김성호는 독일 도르트문트 극장 소속 솔리스트로 활동중이다. 이날, '그대의 찬손(Che gelida manina)'에서 여 주인공 미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의 Chi son(저는요)의 고음을 긴 호흡으로 끌어냈다. 홍석원이 지휘한 국립심포니는 그의 호흡에 맞춰 템포를 늘였다 당겼다를 반복하며 음악 속에서긴장과 이완을 교차시켰다. 특히, '테너의 몸값을 결정하는 고음'이라 불리는 하이 C음을 수려하게 뽑아내며, 한국 오페라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진 토스카 2막은 오페라 무대에서 흔치 않은 압도적 위압감을 자아냈다. 스카르피아의 집무실로 설정된 무대는 회색 벽과 어두운 조명 아래 술병, 재떨이, 서류로 채워져 남영동 고문실을 연상케 했다. 무대 디자이너 김현정은 마렝고 전투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작품의 중심 공간을 전쟁 중인 군부 지하 벙커로 재해석했다. 바리톤 윤기훈(스카르피아 역)은 당당한 체구와 위압감 넘치는 걸음걸이만으로 객석을 압도했다. 담배를 문 그의 모습은 성악가가 아닌, 현실의 폭력적 권력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연출자 엄숙정은 이를 통해 스카르피아를 오페라 속 악당이 아닌, 오늘날 권력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냈다. 회색 벽면에 확대된 그림자 효과는 장면마다, 스카르피아의 압력이 가해질수록, 더해지는 토스카의 절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테너 이범주는 고문으로 지친 카바라도씨가 나폴레옹의 승전 소식을 듣고 외치는 절규를 청량한 고음으로 쏘아 올렸다. 그러나 관객들이 가장 인상 깊게 꼽은 성악가는 토스카 역의 소프라노 서선영이었다. 그는 장면마다 다른 성격의 음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무대를 지배했다. 스카르피아 앞에서는 표독스러운 고음을, 카바라도씨 앞에서는 애정 어린 음색으로 노래했다. 특히, 국립심포니 수석 첼리스트 이경진의 섬세한 솔로가 뒷받침한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more)'는 이날 공연 전체에서 가장 긴 박수를 끌어냈다.
마지막 무대는 베르디 <라트라비아타> 하이라이트였다. 무대 위 대형 상들리에와 고급스러움을 자아낸 바닥의 흑경은 파티 장면에 화려함을 더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손지혜는 비올레타의 아리아 '아 그이였던가(Ah forse lui)'에서 하이 E플랫 고음을 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비운의 여인 비올레타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바리톤 강형규는 제르몽 역으로 나서 비올레타를 파멸로 몰아넣은 죄책감을 서늘한 음색으로 노래했다.
제작극장으로 변모할 것을 공언한 예술의전당(오페라하우스) 본연의 기능은 순수 예술 활성화다. 시대를 거쳐 인정 받은 작품을 한국적 스토리와 결합해, 전막 오페라로 확대·제작하는 것이야말로 'K-오페라'의 시작이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은 작품은 엄숙정 연출과 김현정 무대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오페라 <토스카>2막이다. 예술의전당 갈라 공연에서 출발한 이 작품이 전막으로 확대·제작되는 새로운 예술적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