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싱크탱크 리포트 ⑥ 녹색전환연구소의 ‘도넛으로 만드는 생태복지 도시’
녹색전환연구소가 한국의 도시정책에 ‘도넛 경제(Doughnut Economics)’ 모델을 도입한 첫 사례 연구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번 보고서는 ‘도넛으로 만드는 생태복지 도시’라는 주제로 서울 노원구와 충남 보령시를 대상으로 기후 위기 대응과 복지정책의 결합을 모색한 결과를 담았다.
기후 위기 속 복지정책, 새로운 접근 필요
보고서는 산불·폭염·폭우 등으로 시민들의 생존 위험이 커지는 현실에서 복지정책이 기후 위기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지금까지 복지는 경제성장과 분배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발전주의적 접근에 머물러 있지만 이는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그 격차는 단순한 소득 차이를 넘어 탄소배출과 삶의 질 격차로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주 저자인 배보람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제시한 ‘도넛 경제 모델’을 한국 도시에 적용했다. 도넛 모델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기초(안쪽 원)와 지구의 생태적 한계(바깥 원)의 균형을 추구한다. 도시가 이 두 조건 사이의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에 머물도록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도시 비전으로 도넛 모델을 채택해 건축·교통·소비재 정책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영국 리즈, 벨기에 브뤼셀도 같은 실험을 진행 중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해외 사례를 참고해 한국형 도넛 도시를 구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서울 노원구와 충남 보령시를 대상으로 도넛 모델을 적용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노원구는 인구 53만 명 규모의 거주 중심 소비도시로,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구성돼 있다. 연구소가 노원구를 택한 것은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 수립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보령시는 충남 지역에서 석탄화력발전소를 가장 먼저 폐쇄한 도시다. 2020년 보령 1·2호기가 조기 폐쇄됐고, 인구는 2021년 10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이미 1990년대 석탄광산 폐쇄라는 산업 전환 충격을 경험한 바 있어 보령은 ‘전환 도시’로서 상징성이 크다.
또 두 도시를 대상으로 데이터 분석과 주민 참여형 워크숍을 병행했다. ‘데이터 초상화’는 공식 통계와 지표를 활용해 사회적 기초와 생태적 한계를 평가하는 방식이고, ‘커뮤니티 초상화’는 시민들의 경험과 의견을 반영해 지표를 보완하는 과정이다. 2023년 11월부터 연구원들이 데이터를 분석했고, 2024년 상반기에는 노원과 보령에서 총 6회의 시민 워크숍을 열었다. 이어 지난 6월에는 노원에서 60명 규모, 7월에는 보령에서 120명 규모의 대규모 워크숍을 진행해 ‘도시 도넛’ 이미지를 완성했다.
분석 결과, 노원구는 소득·일자리·주거·이동성·문화 영역에서 사회적 기초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폐기물 관리 외에는 생태적 한계 지표가 대체로 취약했다. 특히 재개발과 교통 인프라 확충이 오히려 생태적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우려로 지적됐다. 즉 사회적 기초를 강화하면서도 생태 한계를 넘지 않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령시는 노원과 마찬가지로 주거·이동성·소득이 부족했으며, 건강과 안전 영역에서도 취약성이 드러났다. 다만 충남의 높은 재생에너지 생산량은 긍정적 지표로 반영됐다. 연구소는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도넛 모형이지만 인구 구조, 산업, 주거 특성에 따라 정책적 해법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형 도넛 도시 실험 결과…복지·기후정책 통합해야
이번 연구는 한국에서 도넛 모델을 기초자치단체 단위에 적용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행정기관과의 긴밀한 협력보다는 연구소 주도의 실험적 성격이 강해 정책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먹거리, 주거, 교통 등 시민 삶의 기본 요소가 복지와 생태 문제를 동시에 포함한다는 사실을 짚었다. 주거는 복지 질을 좌우하는 동시에 자산 형성 수단이 되며, 이는 재개발·재건축을 추동하는 요인이 된다. 교통 역시 이동권 보장과 온실가스 감축의 균형을 요구한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한국 도시정책이 기후 대응과 복지를 분리해 다뤘지만,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는 단순한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 과제라는 주장이다. 보고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도넛 모델을 도시 전반에 적용해 순환경제 전략을 추진하는 것처럼, 한국 도시도 복지정책과 기후정책을 결합해 ‘생태복지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배보람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 “복지·기후정책,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 한국 도시정책에 도넛 모델을 도입한 배경과 기존 정책의 한계는.
“폭염·폭우 등 재난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후 위기 대응과 탄소중립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시민들은 탄소중립 정책이 실제 삶에 어떤 이익을 주는지 연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도넛 모델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억제하면서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지금까지 복지는 경제성장과 분배를 통해 실현된다고 여겼지만, 기후 위기와 팬데믹, 인플레이션 등으로 기존 방식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예컨대 더 저렴한 주택 공급을 위해 개발을 확대하는 방식이 과연 기후 위기 시대에 적절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도넛 모델은 이러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라고 볼 수 있다.”
- 노원구와 보령시를 연구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보령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석탄화력발전소 조기 폐쇄를 경험한 지역으로, 산업 전환의 충격을 반복적으로 겪어온 상징적 도시다. 반면 노원구는 서울의 대표적 거주 중심 소비도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다. 연구소가 노원구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을 직접 수립한 경험도 있어 연구 대상으로 적합했다. 에너지 생산도시(보령)와 에너지 소비도시(노원)를 비교함으로써 기후·복지 전환 전략의 차이를 도출할 수 있다고 봤다.”
- 기후 위기와 복지 통합 과정에서 충돌한 정책 영역이 있었나.
“도넛 모델을 적용하며 시민 의견과 데이터를 반영해 도시 ‘초상화’를 그렸다. 시민들은 일자리, 주거, 교통, 의료 등 지역적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지만, 소비가 해외 사회·생태에 미치는 영향까지 이해하고 논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일자리와 주택에서 충돌이 컸다. 대규모 산업 유치는 양질의 일자리로 인식되지만, 돌봄·요양·청소 등 실제 삶의 질을 높이는 일자리는 불안정하고 저임금이다. 이를 사회적으로 ‘괜찮은 일자리’로 인식하고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지표 설정 과정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도시의 삶이 글로벌 공급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지표화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예컨대, 아보카도 소비가 멕시코 현지의 산림 파괴와 수자원 고갈로 이어지는 사례는 알려져 있지만, 한국인의 소비가 미치는 영향을 수치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일부 지표는 축소해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유엔 지속가능 발전 목표(SDGs, 스톡홀름 지표)를 활용했지만, 장기적으로 한국 도시 맥락에 맞는 지표와 임곗값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노원구와 보령시의 차별적 전략에 대해 설명한다면.
“두 도시 모두 주거 부족이 확인됐지만, 접근 방식은 달라야 한다. 노원구는 노후 아파트가 많아 재건축하는 데 시간과 비용 부담이 크다. 대신 공동주택 리모델링과 재생에너지 설비 등 단계적 개선이 필요하다. 보령시는 농촌 마을이 많아 난방 연료가 연탄·등유 등 탄소집약적이다. 도시가스 보급률도 낮아 에너지 효율 개선과 재생열원 지원 정책이 요구된다. 교통 역시 다르다. 노원구는 자전거 이용률은 높지만 인프라는 부족하다. 중앙버스차로와 자전거도로 확충이 필요하다. 보령시는 농촌 특성상 공공버스 증차와 수요 맞춤형 교통정책이 더 효과적이다.”
-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기초 충돌 극복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행정과의 협력 필요성도 있다고 보는가.
“복지정책과 기후정책을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예컨대 연탄 보조금은 단기적으로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탈탄소 기반 에너지 복지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주거 역시 재건축보다 그린 리모델링을 통해 자원 소비와 탄소배출을 줄여야 한다. 현재 연구는 연구소 주도로 진행돼 정책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행정 협업을 위해서는 도넛 모델을 도시 운영의 핵심 가치로 수용할 지방정부의 의지가 필요하다. 도넛 초상화를 정책 목표 설정과 점검 체계에 반영해야 한다.”
- 한국형 도넛 모델 정착을 위한 과제와 향후 확장 계획이 있나.
“제도적 뒷받침으로는 그린리모델링, 대중교통 활성화, 녹색 일자리 확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적응 관점의 강화를 위해 폭염·폭우·산불 같은 기후 재난에 대비한 안전한 집·도시·교통·노동 정책이 요구된다. 지역 맞춤 전략은 인구·산업구조에 맞는 세부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또 향후 도넛 모델을 도시뿐 아니라 마을·공동체 단위에서도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충남 홍성군에서 주민들과 도넛 워크숍을 진행한 경험이 있으며, 향후 관심 있는 자치단체와 협력해 연구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미경 한경ESG 기자 esit91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