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창업자를 빚쟁이로 만드는 나라

입력 2025-08-25 17:27
수정 2025-08-26 00:41
‘다음 각호의 사유가 있을 경우 투자자는 본인이 소유한 회사의 주식 전부 또는 일부를 회사 또는 이해관계인에게 매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

한국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C) 간의 투자 계약서에 흔히 들어가는 문구다. 여기서 이해관계인은 대개 창업자를 말한다. 회사가 창업자 귀책으로 망하면 거액의 VC 투자금을 갚아야 하는 빚쟁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크로스보더 법무법인 미션을 운영하는 김성훈 대표변호사는 “한국 스타트업 투자 계약에는 99% 이런 조항이 들어간다”고 했다. 주식회사 시스템의 근간인 유한책임제, 즉 기업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명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관행이다. 서로 눈치만 보는 구조지난해 7월 폐업한 프롭테크 기업 어반베이스의 하진우 대표는 이 조항 때문에 졸지에 빚 12억5000만원을 지게 됐다. 지난달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주식매수청구권 조항을 둘러싼 신한캐피탈과 하 대표 간의 1심 소송에서 신한캐피탈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하 대표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계약에 날인했으며 신한캐피탈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조항을 강요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엄정하게 판시했다. 그러나 이를 정말로 자의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리콘밸리에서 한인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정부기관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세 쪽짜리 표준계약서가 일반화돼 이런 조항이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한국에서는 VC 주도로 각자 계약서를 쓰고 이런 조항이 들어가는 게 부지기수”라고 했다.

투자자와 창업자 간의 이해관계를 파고들어 가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구조다. VC들은 기관투자가(LP)들의 눈치를 본다. LP들은 상당 부분 정부기관이 출자한 모태펀드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부기관들은 국회 각 상임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국회의원들은 “국민 세금을 가지고”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투자의 성패를 재단한다. 실패 경험을 중요시해야실리콘밸리는 실패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VC업계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말이 ‘말보다 기수(騎手)’다. 스타트업이 어떤 사업 아이템을 갖고 있는지보다 창업자가 여러 번의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인지 본다는 의미다. 150여 개국에서 사용하는 글로벌 업무용 메신저 슬랙의 시작은 ‘글리치’라는 게임이었다. 2011년 출시된 글리치는 14개월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그러나 글리치에 들어간 채팅 시스템은 호평을 받았다. 창업자들은 이를 업무용 메신저라는 아이디어로 발전시켰다. 실패를 이겨내고 피벗(전환)에 성공한 사례다.

한국 정부는 스타트업의 성공에 집착한다. 얼마나 많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을 만드느냐가 핵심 평가 지표다. 이재명 정부도 다르지 않다.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 13일 “유니콘 기업을 50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123대 국정과제에 실패한 창업자를 지원한다는 내용은 없다. 실패하지 않는 스타트업은 성공률이 99.5%인 국책 연구나 다름없다. 지표에 얽매여 성공하기 쉬운 연구에만 매달리는 사이 진정한 발전은 도외시된다. 이래서는 모험 자본이라는 벤처 투자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